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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Mar 18. 2021

"아내가 납치를 당한 것 같습니다."

아내의 머릿속에는 성능 좋은 지우개가 있다 ep 01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112를 눌렀다

"네, 112 상황실입니다."

"저기... 아내가 납치를 당한 것 같습니다."

"천천히 상세하게 말씀해 보시죠?"

"아내가 1시간 넘게 전화를 받지 않아서......."

"좀 더 기다리면 오시겠죠. 선생님 심정 충분히 이해는 되는데 그 정도로 출동은 힘듭니다."

할 말을 다 하지도 않았는데 상황실 경찰은 중간에 말을 끊으며 지극히 사무적인 톤으로 대답을 했다.


"그게 아니고 집사람이 전화를 계속 받지 않다가 가까스로 통화가 됐는데 병원이라고, 원무과 직원이 대신 받았는데 어떤 남자가 아무 말 없이 전화기를 주고 갔다는 겁니다."

"음.... 알겠습니다. 병원이 어딥니까? 네... 네... 사거리 모퉁이 거기 말씀이시죠? 바로 출동하겠습니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긴급 출동을 하겠다는 답을 듣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모든 신을 총동원해 기도를 드렸다

연락이 두절된 지 벌써 두 시간이 넘었다. 약속이나 시간에 대한 개념이 철저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가끔 지각을 하긴 해도 최대 한 시간 정도였지 그렇게까지 오래 늦은 적은 없었다. 게다가 전화기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발견이 되었고 낯선 남자가 주고 갔다는 게 아닌가. 뭔가 일이 나도 큰일이 났다 싶었다.


마음이 불안하니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당장 나가는 게 맞는데 그날따라 손님은 왜 그리 많은지. 경찰에게 맡겨두고 마냥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가까스로 틈을 내어 가게 문에 메모를 남겨두고 문을 잠갔다. 혹시나 있을 비상상황(범인을 추격한다든가 하는)에 대비해 신발끈도 다시 한번 묶었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이름 있는 신들을 모두 소환해서 기도를 드렸다.

'제발 무사하기만 해 다오.'

준비를 마치고 길을 나서려는데 건너편에서 어떤 여자가 손을 흔들며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아....' 짧은 탄식과 함께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날 나는 속이 잿더미처럼 시커멓게 다 타 버렸다.


사건의 재구성

가게 뒤편에 장애인이 운영하는 공영주차장이 있다. 공영주차장의 특성상 주변 상가 거의 대부분(넓게는 반경 1km 정도까지)의 주차권을 다 받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날 같이 일하던 분이 약속이 있어 자리를 비우게 된 거다. 평소 자주 오시던 단골손님들이라 아내는 그 얘길 듣고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출근길에 잠깐 들러, 모아 놓은 주차권을 돌려주고 자신이 수금을 해오겠노라 얘기를 했던 모양이었다.


그 과정 중에 병원 주차권을 들고 정산하러 갔고 병원에 간 김에 화장실에 들러 용무를 보고 나오다가 세면대 위에 전화기를 올려놓았던 거다. 하필 그 병원 화장실 세면대가 남녀 공용 아닌 남녀 공용 같은 세면대였기에 어떤 남자분이 전화기를 발견해서 병원 내 접수처에 맡긴 것이고 그 바람에 모든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아내는 기본적으로 심성이 참 고운 여자다. 문제는 그 착한 심성을 오며 가며 남발을 한다는 것이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일에 나서서 안 좋은 소리를 들을 때도 많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철두철미하게 계산적이다. 손익을 따지는 계산적인 사람이 아니라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스타일이란 뜻이다. 그러다 보니 살면서 의견 충돌을 하는 경우가 꽤 많이 있다.


그 사건만 해도 내가 당사자였다면 주차장 관리하시는 분이 먼저 부탁을 하지 않는 이상 나는 그냥 흘려듣고 말았을 일이다.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도 아니었고 다음날이든 그다음 날이든 다른 분이 해도 충분할 일을 왜 자진해서 손을 번쩍 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후에도 아내는 몇 번이고 전화기를 버리(?)고 다녔다. 역 대합실에 전화기를 두고 열차를 탄 적도 있고 택시에서 내리며 흘려서 지나가던 행인이 발견하고는 전화기를 전해주기 위해 갈 길을 가지도 못하고 한참을 기다리게 한 적도 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선 그것은 완벽한 민폐다.


아내와 함께 살게 된 이후 내가 할 일이 한 가지 늘었다. 식당을 가든 카페를 가든 자리에서 일어설 때면 항상 마지막으로 테이블 주변 점검을 하는 것이다. 아내가 계산을 위해 카운터로 향하는 그 시간에도 나는 매의 눈으로 자리를 살핀다. 아마도 반려동물 인식 칩처럼 손목에 삽입하는 내장형 전화기가 개발되지 않는 이상 나의 이 미션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해본다. 신들이 모여서 회의를 열다가 그중에 캡틴 신께서 '아무래도 쟤(아내)는 특별관리를 할 사람이 필요한데 내 눈에는 얘(아르웬)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 같아. 어떻게든 둘이 좀 붙여봐.' 라고 지시를 내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내 상상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서 '하늘은 주유를 낳으셨으면 그만이지 왜 또 제갈량을 낳았단 말인가.'라고 탄식을 했다던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하늘은 나를 낳았으면 됐지 왜 아내를 나에게...........


요즘도 아내는 도를 넘어선 건망증 증세를 보일 때가 많다. 그때마다 항상 나는 아내에게 묻곤 한다.

"당신, 혹시 내 이름 잊어버린 건 아니지?"

"이 아저씨가 장난 하나? 그걸 말이라고 하나? 윤.돼.지!!"


다행히 아내는 내 이름을 아주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아 아직은 안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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