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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Nov 15. 2021

니는 우째 하고 싶은 기 그리 많노?

어느 취미 부자 남편의 반성문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던 남자

시대를 잘못 타고난 거라 생각했다. 그 시절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그랬듯 우리 부모님도 당신들이 겪었던 배우지 못한 한을 자식에게만은 절대 물려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그러했으니 교과 과정 자체도 누가누가 서울대를 많이 보내나, 어느 학교가 4년제 대학에 많이 입학시키는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당연히 정규 과목 외에 모든 것은 '이단'처럼 취급받았다. 지금의 '동아리'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기 전까지 친목이나 특기, 취미 생활을 하는 교내 모임은 '서클'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고 그 앞에는 항상 '불량'이라는 단어가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한마디로 '서클=불량서클'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시기였다.


일부 빗장이 풀린 것은 대학 입학 후였다. 대학 보내는 것이 당면과제였던 부모님께서도 대학 입학 후에는 크게 간섭을 하지 않으셨다. 기타 동아리에 가입을 하고 밥 먹는 시간도 잊은 채 기타에 미쳐 날뛰었다. 가방에는 교재 대신 항상 악보들이 넘쳐났고 기타를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도 불사하는 망나니 짓을 서슴지 않았으나 항상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 경제력의 한계에 부딪힌 거다.


그 족쇄가 완전히 풀린 것이 아내를 만난 이후였다. 가정을 꾸리고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바뀌게 되자 예전에 못했던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하나둘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첫 시작은 열대어 키우기였다. 곧 태어날 아기의 정서 발달을 위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갖다 붙였지만 어릴 적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봤던 대형 수조에 대한 기억, 그 부러움이 제일 컸다. 아내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인근 대형 마트에서 작은 어항과 함께 열대어 몇 마리를 샀다.


그날부터 폭풍 검색이 시작되었다. 열대어 관련 카페에도 가입을 하고 하나하나 배우다 보니 이거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열대어가 어느 정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1자 반 또는 2자짜리 수조는 되어야 하고 장난감 같은 인공수초나 구조물보다는 자연친화적으로 수초와 바닥재도 바꿔야 한다고도 했다. 수초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이산화탄소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듣고 이런저런 정보를 종합해보니 이건 나 같은 서민이 할 수 있는 취미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고민에 고민을 하던 중 때마침 이어진 이사를 핑계로 가진 모든 장비를 헐값에 중고로 팔고 깔끔하게 접었다.


그다음은 사진이었다. 이 또한 아이의 육아일기에 필요한 사진을 잘 찍고 싶어서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이 100일 사진도, 돌사진도 내 손으로 찍었고 대형 액자 사진과 성장앨범까지 셀프로 해결을 했으니 어느 정도 약속은 지킨 셈이다. 거기에 더해 열심히 활동을 하던 시절엔 각종 공모전에 나가 상금과 상품을 꽤 짭짤하게 벌어들이기도 했으니 아내 입장에서도 크게 나쁘진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사진을 찍으면 찍을수록 드는 뭔가 부족한 듯한 느낌. 생태사진을 찍고 싶었던 내겐 렌즈 하나에 천만 원이 훌쩍 넘는 비용은 고사하고 밖으로 다닐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언젠가 은퇴를 하고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다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눈물을 머금고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좌측부터 함안 악양루, 동판저수지 기러기, 동판저수지 일출     사진 출처 : 본인 외장하드
좌측부터 울산 명선도 일출, 진해 경화역 벚꽃     사진출처 : 본인 블로그



다음은 돌고 돌아 다시 기타였다. 내 인생의 황금기와도 같았던 그 시절이 생각나 백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올 솔리드 급 기타를 사고 나의 절대음감에 맞는 소리를 녹음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해외직구를 통해 국내에서는 구하기 힘든 음악 전용 녹음기까지 사는 만행을 저질렀다.


자칫 잘못하면 숨소리마저 녹음이 되는 타스캠 DR-40 녹음기 사진 출처 : 본인 블로그



이후에도 온갖 다양한 지름은 계속되었다. 서예를 하겠다고 2년이란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더 늙어 노안이 오기 전에 배운다는 핑계로 인근 문화센터에 피아노 수강을 신청하기도 했다. 참 다양하게도 저질렀다.



그 순간에는 알 수 없었던 것

"또 뭔데?"

"칼림바라고 좀 생소한 악기가 있어. 이걸로 유튜브 영상을 찍어서 올리면 나의 돼지족발 같은 손가락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모습에 사람들이 열광을 하지 않을까?"

"하이고, 니는 우째 하고 싶은 기 그리 많노? 니 알아서 해라. 니가 언제 내 허락받고 뭘 했다고."

이번에도 만능 치트키와도 같은 딸아이를 앞세웠다. 다음 학기 수행평가 때를 대비해서 미리 사서 연습하면 딸아이에게도 좋고 나도 좋다는 마법 같은 논리였다.


"그런데 말이야. 당신은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없어."

"아니, 그러지 말고. 나는 그렇다 치고 당신은 어쩜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살 수 있어? 관심 있는 것도 없고 취미도 없고, 특기도 없고 도대체 세상을 무슨 낙으로 살아?"

"니 괴롭히는 낙으로 산다. 됐나?"



18년째 같이 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아내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도 많다. 한 번은 대학 다닐 때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화려(?)했던 나의 과거를 가감 없이 다 얘기를 했음에도 아내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지나간 얘기 해서 뭐하겠냐는 듯 말끝을 흐리는 아내에게도 꿈이 있었고 희망사항이 많았을 텐데 그걸 숨기고 있는 거다.


처음 연애하던 시절 여느 남자들이 그렇듯 손에 물 한 번 묻히지 않겠다는 둥, 호강시켜준다는 둥, 행복하게 해 줄 거라는 둥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얘기를 하진 않았었다. 그 대신 지금 마음 그대로 한결같이, 변함없이 함께 있어줄 거라 얘기했다. 그때 아내는 흘러가는 듯한 말투로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했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학부 시절 제대로 못한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갑자기 그 말이 왜 생각나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나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했다. 온갖 명분을 다 갖다 붙여가며 내 욕심을 채워가는 동안 아내는 내가 하는 일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이. 누군가 하고 싶었던 것을 하는 그 이면에는 반드시 다른 이의 희생이 뒤따른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부끄러운 고백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에는 그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항상 믿어주고 재능을 발견하고 그걸 지원해주는 것이 비단 자식에게만 허용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아내(또는 남편)가 뭘 하고 싶어 했고 지금 현재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나는 그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한 번쯤은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까?


더 늦기 전에 이 빚을 갚아야 할 텐데 나는 아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스스로 세심하고 다정한 남편이라 자부하던 내가 정작 아는 게 거의 없다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무던하기만 한 아내가 새삼 고맙다.

표현을 잘하지 않고 무뚝뚝하기만 한 아내에게 불만 가득했던 지난날을 나는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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