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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독관리사무소장 Aug 30. 20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의 처음

<시즌1> 2,189마일 애팔래치안 트레일 걷기 (D+4)

2017.04.30 SUN D+4 (흐리다 갬)
Today : 18 @cheese factory site

Total : 56.3


오늘은 새로운 것들을 많이 경험하게 되었다. 보통 많은 AT하이커들은 3월초~4월중순 전에 시작을 하는편인데 우리의 경우 4월 말이 되서야 떠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길은 조금은 외로웠을 수도 있다. AT가 워낙 유명한 장거리트레일이다보니 AT를 걷게되면 매일같이 엄청나게 많은 하이커들을 만나고 (때로는 그다지 의미없는 how's going?을 수없이 반복해 이야기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트레일매직을 엄청 자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들어왔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우리 둘이 걷는 날도 많았고 트레일매직도 한번도 만날 수 없었다. 뭐 우리가 걷기 시작한지 겨우 나흘밖에 되지않은 것이라 그렇겠지만.



그러다가 오늘 첫 트레일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한동안 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면서 걸으며 만난 해리는 녹색의 티셔츠를 입고 녹색계열의 배낭과 신발을 신고 있었다. 꽤나 어려보이던 그 친구는 보스턴출신으로 오빠의 트리플크라운에 대한 이야기에 엄청 놀라워하며 관심을 가졌다. 한참을 같이 걸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도하고 평창 올림픽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우리는 더 걸을 생각이었지만, 해리가 쉘터에서 쉬게되어 비록 짧은 시간만 보냈지만 처음으로 제대로 통성명을 하고 의미있는 시간을 보낸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첫번째 트레일매직도 만났다. 열심히 오르막내리막을 걷다가 산과 산 사이지형인 Gap에 도달해서 다음 산으로 가던 찰나 트레일헤드에 무엇인가 놓여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바로 누군가가 두고간 비닐지퍼백!! 그 속에는 애드빌, 연고, 밴드, 소독솜 등 각종 비상약들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초코렛들도 몇개. 엄청나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트레일을 걷는 하이커들을 위한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을 느낄수 있는 순간이었다.

처음 트레일친구를 사귀고 처음 트레일매직을 만나 AT의 첫 기억들을 만들어 가면서 예전 오빠가 <4,300km>에서 썼던 글이 생각났다. 과연 나의 첫 기억은 무엇일까. 기억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의 삶에서 어떤 것을 처음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X"양보"캘리그라피 작가
기억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의 삶에서 어떤 것을 처음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쉽지가 않았다. 한참을 고심하다가 생각해 낸 것은  대여섯살 때 가족들과 남한산성 근처 계곡에 놀러갔던 기억이었다. 계곡에서 물장구를 치다가 물 위에 떠있는 소금쟁이를 먹을 뻔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기억을 계속 되짚어보니 그것은 나 스스로가 떠올려낸 기억이 아니라 어렸을 때 찍어두었던 사진으로부터 비롯된 나의 기억이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과정을 몇차례 반복하다보니 순수하게 내 머리속에 남아있는 기억들을 찾아내기가 어렵게 느껴졌다. 내 기억력의 한계인가싶다가도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새롭고 강렬한 경험을 추구하고 그것을 기억하고 싶어하지만 금새 또 다른 기억들에 밀려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이번 AT를 하는 지금의 기억들을 잘 간직하고 생생히 기억하기위해, 경험하고 느끼는 것들을 차곡차곡 잘 쌓아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20년, 50년이 지났을 때  남겨진 사진으로 AT를 기억하기보다는 나의 머리와 가슴 속에 새겨진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facebook : @seeyouonthetrail
instagram : @stella_sky_nu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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