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W 인천 캠퍼스, 새벽이슬의 사계

24화 : 새벽이슬의 화요일 밤, 멈춘 자리에서 피어난 희망

by 뽀송드림 김은비

월요일 밤,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이 건넨 위로 덕분이었을까. 새벽이슬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화요일 아침을 맞았지만, 회사의 공기는 여전히 맴돌았다. 퇴사를 앞둔 시간, 그녀에게는 이제 누구도 중요한 업무를 맡기지 않았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듯, 그녀의 자리는 잠시 정지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새벽이슬은 그 공백을 그저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노트북을 열고 야간 대학 과제와 앞으로의 계획을 촘촘히 정리하는 것으로 그녀는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했다.


화요일의 강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새벽이슬은 갇힌 듯했던 회사 문을 박차고 학교로 향했다. 그날의 첫 강의는 '발달심리학'.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교수님의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인간의 생애 주기를 꼼꼼히 짚어 내려갔다. 각 단계마다 인간이 짊어져야 할 과제와 심리적 변화를 설명하던 중, 중년기의 발달 과제인 '자기 통합' 이야기는 새벽이슬의 가슴팍에 날카롭게 박혔다.


“여러분,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단계에서 중년기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의미를 찾는 시기입니다. 단순히 외적인 성과나 물질적 성공을 넘어, '내가 살아온 삶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통합하는 과정이 중요해요. 이 과정이 흔들리면, 깊은 허무함이나 절망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교수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그녀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펜을 쥔 손이 공중에 멈췄다. '일'이라는 잣대 하나로 자신을 평가하며 쉼 없이 달려왔던 지난날들. 그리고 지금, 그 잣대가 무너지는 순간 밀려오는 막연한 불안감과 허무함. 아, 이것이 바로 '자기 통합'이라는 숙제였구나. 깨달음은 씁쓸함 대신 묘한 설렘을 안겨주었다. 퇴사는 끝이 아니라, 자신을 완성해 나갈 새로운 시험이자 성장의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불빛이 불안의 먹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도전의 불꽃을 피우다

발달심리학 강의가 남긴 묵직한 여운을 정리할 틈도 없이, 두 번째 강의 '프로그램 개발과 평가' 시간이 시작되었다. 교수님은 사회복지 프로그램 기획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팀을 이루어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과제를 던져주었다.


새벽이슬은 팀원들과 머리를 맞댔다. "우리 동네 어르신들이 스마트폰 사용을 너무 어려워하세요. '시니어 디지털 문해력 향상 프로그램'을 기획해 보면 어떨까요?" 새벽이슬의 제안에 팀원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놀랍게도, 회사에서 쌓았던 그녀의 직장 경력과 기획 능력은 이곳 야간 대학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녀가 작성한 기획안은 논리적이고, 목표와 평가 방법이 명확했다. 그녀는 잊고 있었던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팀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새벽이슬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회사에서는 아무도 맡기지 않아 텅 비어버렸던 '기획'이라는 일을, 이곳에서는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나의 경험과 능력이 사라진 게 아니었구나. 오히려 새로운 곳에서 더 힘 있게 빛을 발할 수 있겠구나.'


어두운 밤거리였지만, 새벽이슬의 마음속에는 작고 따뜻한 희망의 불꽃이 톡톡 터지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막연한 불안으로 가득 찼던 퇴사 후의 삶이, 오늘 두 개의 강의를 통해 자신이 가진 가치와 새로운 목표로 조금씩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달력 속 D-Day와 새로운 일상

집에 돌아온 새벽이슬은 아들 한월이와 따뜻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 야간 대학에서 얻은 깨달음 덕분이었을까, 그녀는 한월이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월이가 달려와 품에 안겼다. "엄마! 오늘 저녁 뭐 먹어? PC방은 언제 가?" 해맑은 물음에 새벽이슬은 진심으로 환하게 웃었다. "오늘은 엄마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김치찌개 끓여줄게. PC방은 우리 다음 주에 꼭 가자. 엄마가 시간표에 적어 놓을게."


저녁 식탁에 마주 앉은 모자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월이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신나게 이야기했고, 새벽이슬은 진심으로 귀 기울이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회사에서는 늘 노트북과 씨름하느라 아들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었던 것과 확연히 달랐다. 오늘은 오롯이 아들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했다. 한월이는 그런 엄마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알아챈 듯,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식사를 마친 후, 각자 방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한월이가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켜더니 불쑥 말을 걸었다. "엄마, 잠깐만. 나랑 이거 같이 봐줄 수 있어?" 녀석이 틀어 놓은 것은 수학 문제 풀이 영상이었다. 새벽이슬은 한월이 옆에 앉아 화면을 함께 보며 대화를 나눴다.


"이건 왜 이렇게 푸는 거야?" 한월이의 질문에 새벽이슬은 "아, 이건 곱셈 공식을 응용하는 문제인데..."라며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한 시간 남짓 함께 공부하다가, 한월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 엄마. 이제 좀 알 것 같아."


한월이가 방문을 닫고 들어간 뒤, 새벽이슬은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퇴사 후의 불안감은 여전하지만, 적어도 이 아이와의 시간을 잃는 건 아니구나.' 그녀는 오늘 배운 '자기 통합'이라는 단어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어쩌면 그녀의 삶에서 '일'이라는 퍼즐 조각이 잠시 빠져나간 자리를 '가족'이라는 소중하고 따뜻한 조각이 이미 채워주고 있는 건 아닐까. 어둠 속에서 그녀의 마음은 희망과 사랑으로 잔잔히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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