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지도를 그려가는 과정

by 뽀송드림 김은비

학원 복도의 불빛은 밤이 깊을수록 더 투명하게 빛난다. 어제는 그 불빛 아래 박힌 이름표들이 나를 찌르는 화살 같았는데, 오늘은 그저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풍경처럼 보인다. 수많은 석사, 박사, 전문가의 경력들. 가만히 들여다보니 저 화려한 이름표들도 결국 밤잠을 설쳐가며 얻어낸 삶의 훈장이다.

그들 또한 이 종이 한 장을 벽에 붙이기 위해, 나처럼 수많은 쉼표를 삼키며 이 복도를 서성였을 것이다. 가방을 열어 책상 위에 소지품들을 쏟아낸다. 엑셀 수식이 적힌 포스트잇과 요양보호 교과서, 그리고 끝이 갈라진 볼펜 한 자루. 어제는 이들이 서로 엉켜 나를 ‘잡동사니’처럼 보이게 한다고 생각하며 서러웠다.


하지만 오늘 밤, 스탠드 불빛 아래 놓인 이것들은 묘하게 다정해 보인다. 낮의 노동을 증명하는 수첩과 밤의 열망을 담은 노트가 한 곳에 누워 있는 풍경. 그것은 어설픈 수집가의 전리품이 아니라,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고 성실히 일궈온 삶의 무늬였다.

체크카드의 잔액을 확인하며 씁쓸하게 웃던 밤도 이제는 담담하게 지나간다. 부족한 숫자는 내 삶의 결핍이 아니라, 내가 내 힘으로 지탱하고 있는 오늘의 무게다.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나의 노동으로 사 온 공책과 책들. 그 빳빳한 종이의 질감이 나에게는 그 어떤 화려한 이름표보다 더 든든한 훈장이다.


버스 창밖으로 흐르는 도시의 불빛들은 이제 나를 비웃지 않는다. 저마다의 속도로 깜빡이며 어둠을 견디는 작은 눈동자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가 있으면, 좁은 골목길을 걷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남들보다 조금 느리고, 조금 더 복잡하게 산다고 해서 틀린 삶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풍경을 더 많이 마음속에 모으며 걷는 중인지도 모른다.


다시 펜을 쥔다. 첫 문장이 완벽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세상이 내어준 정답지에 내 오답 같은 삶을 꾸역꾸역 적어 넣는 일이 아니라, 나는 지금 나만 읽을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니까. 이름표 정글 속에서 나를 분실해도 괜찮다. 길을 잃어야만 만날 수 있는 숲의 깊은 향기가 있고, 길을 잃어야만 발견할 수 있는 나만의 걸음걸이가 있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누군가의 부속품이나 학생으로 불리겠지만, 이 방 안에서 글을 쓰는 지금만큼은 나는 누구의 이름표로도 설명되지 않는 오롯한 '나'다. 화려한 이름표 뒤에 숨겨진 서글픈 민낯조차도, 실은 빛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는 아주 선명하고 예쁜 얼굴임을 이제는 안다.


노트 위에 꾹꾹 눌러쓴 마지막 문장 끝에, 아주 작고 예쁜 쉼표 하나를 찍는다. 마침표를 찍지 않아도 괜찮은 밤이다. 아직 우리가 써 내려가야 할 문장들이 너무 많이 남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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