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예비 고1 엄마의 행복한 불면

by 뽀송드림 김은비

깊은 잠을 청해보고자 눈을 지그시 감았지만, 어둠 속에서 의식은 오히려 더 또렷하게 깨어난다. 아들이 타준 커피 속의 설탕 때문인지, 아니면 중학생 티를 벗고 이제 정말 고등학생이 되는 아들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혀 마음이 몽글몽글해진 탓인지 알 수 없다.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를 나직하게 켜자, 낮게 깔린 주황색 불빛이 방 안의 공기를 포근하게 감싼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나만을 위한 진짜 '두근대는 쉼표'가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불속에서 몇 번을 뒤척이다 결국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선다. 식탁 위에는 아까 아들이 내밀었던 빈 머그컵이 여전히 따스한 흔적을 머금고 있다. 녀석은 벌써 꿈나라로 여행을 떠났는지 방문 너머로 고른 숨소리가 들려온다. 내일이면 저 정든 중학교 교정을 떠나 새로운 시작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겠지. 나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앨범 하나를 꺼내 식탁 앞에 앉는다.


사진첩 속에는 갓난아기 시절의 꼬물거리던 손발부터, 처음 초등학교 가방을 메고 어색하게 웃던 아이의 성장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빽빽한 엑셀 시트의 숫자들은 내일이면 잊힐 휘발성 데이터들이지만, 이 낡은 사진 한 장 한 장에 담긴 기억은 갈수록 선명해지는 삶의 자산이다. 휠체어를 밀며 보폭을 맞추던 학원에서의 시간처럼, 나 역시 아이의 성장 속도에 내 보폭을 맞추며 여기까지 걸어왔음을 깨닫는다. "나 신생아 아니야"라며 웃던 짝꿍 언니의 농담이 떠올라 다시금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그래, 아이도 어느새 부쩍 자라 엄마의 피로를 읽고 커피를 탈 줄 아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일 아침 들고 갈 꽃다발이 혹여나 시들까 싶어 분무기로 가볍게 물을 뿌려준다. 꽃잎 끝에 맺힌 물방울이 스탠드 불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인다. 꽃다발 사이에 끼워 넣을 작은 카드도 한 장 꺼내 든다. 업무 일지를 쓸 때의 딱딱한 문체 대신,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가장 따뜻한 진심을 적어본다.


To. 대견한 우리 아들에게

중학교 3년 동안 고생 많았어. 네가 타준 커피처럼 네 앞날도 달콤하고 따뜻하길 바랄게. 물론 살다 보면 때로는 씁쓸할 때도 있겠지만, 엄마는 네가 잘 이겨낼 거라 믿어.

사랑한다, 우리 아들!


꾹꾹 눌러쓴 글씨 위로 아들을 향한 깊은 신뢰와 사랑이 배어난다.


창밖의 밤공기는 이제 완연한 고요 속에 잠겨 있다. 내일은 출근 전쟁도, 복잡한 수식과의 싸움도 없다. 오롯이 아들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고, 그동안 애써온 서로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하루가 될 것이다. 세상이 매기는 숫자나 통장의 잔액으로는 결코 가늠할 수 없는, 생의 가장 선명하고도 두툼한 행복이 가슴 한구석을 채워온다. 준비를 모두 마치고 다시 침대에 눕자, 아까와는 다른 평온한 노곤함이 찾아온다.


내일 아침, 아들의 졸업식에서 들릴 활기찬 교가 소리와 사람들의 축복 섞인 웅성거림을 상상해 본다. 그 풍경 속에 환하게 웃고 있을 우리 가족의 모습이 미리 본 선물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제야 비로소 눈꺼풀이 기분 좋게 무거워진다. 내일의 특별한 휴일을 꿈의 입구까지 마중 보내며, 나는 비로소 깊고 단 잠의 세계로 빠져든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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