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했던 감기가 드디어 꼬리를 내렸나 보다. 며칠 동안 유리 조각을 삼킨 듯 따갑던 목이 신기하게도 부드러워졌다. 침을 삼키는 것조차 고역이라 쌀국수 국물로 겨우 달래던 시간이 언제였냐는 듯, 이제는 제법 힘 있는 목소리가 나온다. 덕분에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학원 문을 열 수 있었다. 오늘은 우리 기수들이 그동안의 이론 수업을 마무리하며 작게 ‘종강 파티’를 여는 목요일이다.
강의실 문을 열자마자 코끝을 스치는 냄새부터가 평소와 달랐다. 늘 맡던 소독약 냄새나 묵직한 책 먼지 대신, 고소한 기름 냄새와 달콤한 과일 향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명절 끝자락이라 그런지 동기들이 저마다 집에서 챙겨 온 정성스러운 음식들이 책상 위를 풍성하게 메웠다. 정성껏 부쳐온 전부터 잘 익은 과일, 쫀득한 떡까지. 소박하지만 따뜻한 상차림이었다.
“어머, 몸은 좀 어때? 목소리가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걱정해 주는 동기들과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며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다. 휠체어를 밀 때의 요령을 몰라 쩔쩔매고, 서로 기저귀 가는 법을 실습하며 쑥스러워하던 서툰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이도, 살아온 환경도 제각각이지만 ‘누군가의 마지막을 돌보는 따뜻한 손길이 되겠다’는 하나의 꿈으로 뭉친 우리였기에, 그저 함께 웃고 떠드는 이 시간이 참으로 포근하고 달콤했다. 서울에 가지 못한 아쉬움이 동기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하지만 파티의 흥겨움도 잠시, 강사님께서 교단 앞에 서자 강의실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이제는 ‘연습’이 아닌 ‘진짜 현장’으로 나가는 실습 지침이 내려질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눠주신 실습 일지 양식을 앞에 두니 갑자기 손끝이 찌릿했다. 아직은 하얀 빈칸들을 바라보며, 내가 마주할 어르신들의 성함과 그분들에게 해드릴 마음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서툰 글씨로 연습 삼아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는 동안, 아까까지만 해도 파티를 즐기던 동기들의 눈빛도 어느새 제법 비장해졌다. 단순히 글자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는 일이라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셨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밝은 옷’에 관한 이야기였다.
“여러분, 실습 때는 무조건 밝은 색 옷을 입으세요. 인지 기능이 약해진 어르신들에게 검은색이나 짙은 남색 같은 어두운 옷은 위압감을 주거나 무섭게 느껴질 수 있거든요. 화사한 옷차림이 어르신들의 마음을 여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나니 옷장에 걸린 내 옷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평소 무난하게 입던 옷들이 누군가에게는 공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내 취향이나 편의보다 어르신들의 정서적 안정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요양보호사의 기본자세가 가슴 깊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또 하나 마음을 울렸던 건 ‘너무 잘해주지 말라’는 뜻밖의 말씀이었다. 처음 가는 실습생의 의욕이 너무 앞서서 과한 친절을 베풀면, 오히려 거기서 묵묵히 일하시는 요양보호사분들이 비교를 당해 곤란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저번 학생은 이것도 해줬는데 당신은 왜 그래?”
이런 말이 나오게 하는 것은 진정한 봉사가 아니라 현장의 질서를 깨뜨리는 행동이라는 조언이었다. 그곳의 질서를 존중하고, 정해진 할 일만 조용히, 성실하게 수행하고 오는 것. 그것이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배려이자 프로의 자세라는 것을 배웠다.
여기에 깨끗한 하얀 실내화와 정갈한 앞치마, 내 이름 석 자가 또렷이 박힌 명찰, 그리고 개인위생을 위한 개인 물병까지. 준비물 하나하나를 체크하는 손길에 정성이 담겼다. 특히 어르신들의 종잇장처럼 얇은 피부에 혹시라도 상처를 낼까 싶어 손톱을 바짝 깎고 매끄럽게 정리해야 한다는 세심한 주의사항까지 듣고 나니, 비로소 내가 ‘진짜’가 된 기분이 들었다.
학원 문을 나서며 가방 속에 넣은 실습 일지 뭉치가 왠지 묵직하게 느껴졌다. 목요일의 파티는 끝났지만, 마음속에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내일이면 이 마음을 안고 실습 가방을 차근차근 꾸려야 할 것이다. 감기는 내 걸음을 잠시 멈추게 했을 뿐, 그 덕분에 나는 더 낮은 자세로, 더 세심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멈췄던 내 걸음은 이제 다시, 아주 기분 좋게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