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찬바람을 뚫고, 마음으로 깎은 손톱

by 뽀송드림 김은비

지독했던 겨울 감기가 물러간 자리에 상쾌하면서도 알싸한 2월의 아침 공기가 밀려들었다. 어제 가졌던 종강 파티의 기분 좋은 여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곧 맞닥뜨릴 실습에 대한 기분 좋은 긴장감 때문이었을까. 휴대폰 알람이 채 제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눈이 번쩍 떠졌다. 창문을 열자 2월 특유의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훅 하고 끼쳐왔지만, 신기하게도 며칠간 나를 괴롭히던 목의 통증은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마치 새로운 시작을 축복이라도 하듯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실습 기간 내내 나의 살구가 되어줄 옷을 고르는 것이었다. 평소 손이 자주 가던 무채색의 짙은 옷들은 잠시 장롱 깊숙이 밀어두었다. 홀로 외로움을 견디고 계실 어르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위압적인 모습으로 다가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옷장을 뒤적이다 보니 구석에 걸려 있던 연한 베이지색 면바지와 부드러운 파스텔톤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다리미를 꺼내 정성껏 주름을 펴는 시간. 치익- 소리와 함께 올라오는 따뜻한 김을 느끼며 생각했다. 이 빳빳하게 펴진 옷깃처럼, 나의 마음도 어르신들 앞에서 정갈하게 펴져 있기를. 이 화사한 색감이 그분들의 적적한 일상에 아주 작은 에너지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옷감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낮, '미리' 채워 넣은 실습 가방 속의 결심

점심을 든든히 먹고 학원으로 향하기 전, 낮 시간은 오롯이 나 자신을 점검하는 고요한 시간이었다. 거울 앞에 앉아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나의 손이었다. 혹여나 어르신들의 종잇장처럼 얇고 약해진 피부에 작은 생채기라도 낼까 싶어 손톱을 바짝 깎아 내려갔다. 깎아낸 뒤에도 안심이 되지 않아 손톱 줄로 끝을 조심스럽게 문질러 아주 매끄럽게 다듬었다. 짧아진 손톱이 조금은 어색하고 손끝이 아릿하기도 했지만, 보드라워진 감촉을 만져보니 비로소 누군가를 온전히 돌볼 준비가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학원에 갈 채비를 마치고, 방 한편에 놓아둔 실습 가방을 미리 열어보았다. 아직 며칠의 시간이 남았음에도 제 마음은 벌써 차가운 복도를 지나 어르신들의 방 앞에 서 있는 듯했다. 가방 안에는 나를 대신해 어르신들을 만날 소중한 물건들이 정갈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뽀드득 소리가 날 만큼 깨끗하게 닦아둔 하얀 실내화와 정갈하게 접은 앞치마. 내 이름이 적힌 명찰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여분의 마스크, 그리고 어르신의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고 적어낼 메모지와 볼펜.


그리고 나의 컨디션을 지켜줄 묵직한 물병까지.


하나씩 물건을 챙겨 넣을 때마다 가방의 무게가 점점 묵직해졌다. 그 무게는 단순히 물건의 무게가 아니라, 앞으로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요양보호사'라는 이름의 책임감처럼 느껴졌다. 가방을 든든하게 바라본 뒤, 가벼운 에코백 하나만 메고 마지막 수업을 위해 집을 나섰다. 학원으로 향하는 길, 길가에 선 가로수들은 아직 잎 하나 없이 앙상한 가지로 2월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었다. "아직은 참 춥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으며 옷깃을 여몄지만, 그 단단한 나무들이 보이지 않는 뿌리 끝에서부터 봄을 준비하듯, 나 또한 이 겨울의 끝자락에서 어르신들을 품어 안을 내면의 단단함을 차곡차곡 채워가고 있었다.


마지막 수업: '기억'이라는 이름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법

학원 문을 열자 평소보다 활기차면서도 사뭇 진지한 공기가 강의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늘은 이론의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자, 현장이라는 거친 바다로 나가기 전 마지막 닻을 올리는 최종 점검의 날이었다.


첫 교시는 치매 관련 강의로 시작되었다. 강사님께서는 치매를 단순히 뇌의 병으로만 치부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치매란, 조금씩 지워져 가는 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우리가 함께 펜을 잡고 써 내려가는 눈물겨운 과정입니다." 그 말씀에 펜을 쥐고 있던 손등에 힘이 들어갔다.


인지 기능의 저하: "어제는 분명히 기억하던 내 이름을 오늘 잊으시더라도 절대 서운해하지 마세요. 그분들의 기억 속에서 길을 잃은 것뿐이니까요."


공감의 언어: "왜 그러시냐고 논리적으로 따지기보다, 그분들이 느끼는 그 막연한 불안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먼저 읽어내야 합니다."


이어지는 강의는 요양보호사의 철학과 태도에 관한 깊이 있는 담론이었다. 기술적인 수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드리는 마음'이라는 대목이 가슴을 울렸다. "우리는 그저 손발이 되어드리는 존재를 넘어, 그분들의 삶이 여전히 가치 있고 아름답다는 것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라는 강사님의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동기들의 깊은 끄덕임이 이어졌다.


긴장과 웃음 사이, 우리들의 뜨거웠던 총정리

오후가 되자 강의실의 분위기는 다시금 비장해졌다. 그동안 배운 방대한 양의 의학 지식과 법규들을 한 장의 시험지에 쏟아내야 하는 필기시험 총정리 시간. 예상 문제를 풀어나가는 동기들의 펜 소리가 서걱서걱 들려오며 정적을 깼다. 헷갈리는 의학 용어를 서로에게 묻고, 복잡한 제도들을 암기하며 우리는 마지막 스퍼트를 올렸다.


특히나 긴장됐던 순간은 직접 체험해 본 인지 테스트 시간이었다. 어르신들이 실제로 받게 될 검사를 우리가 보호자가 아닌 피검사자의 입장에서 받아보며, 사소한 질문 하나에도 얼마나 큰 용기와 집중력이 필요한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이 몇 월 며칠이죠?"

"방금 제가 말씀드린 세 단어를 다시 한번 기억해 보세요."


짧은 질문과 답변 사이로 흐르는 침묵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 고요를 견디며 깨달았다. 실습 현장에서 내가 어르신들을 기다려 드려야 할 그 '인내의 시간'이 결코 짧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그 기다림 자체가 가장 큰 돌봄이 될 수 있음을 말이다.


모든 과정이 끝나고,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달콤한 커피와 다과를 나누었다. 칠판 앞에 모여 찍은 단체 사진 한 장에는 지난 몇 주간의 고단함과 다가올 내일에 대한 설렘이 공존하고 있었다. 사진 속의 나는 조금 긴장한 듯 보였지만, 2월의 찬 바람을 뚫고 온 사람 특유의 단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봄을 품은 2월의 끝자락에서, 나는 나만의 가방을 메고 그분들의 삶 속으로 한 걸음 더 깊숙이 걸어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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