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각, 학원 건물을 나서자 도시의 소음은 한풀 꺾여 있었고 공기는 아침보다 더 날카롭게 폐부 깊숙이 박혔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하얗게 흩어지는 입김을 보며 가방끈을 고쳐 멨다. 가방 속 실내화와 앞치마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밤거리에 작게 울려 퍼졌다.
밤 10시, 차가운 금속 손잡이에 전해지는 온기
막차를 기다리는 정류장 벤치에는 나처럼 하루를 무겁게 보낸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겠지만, 오늘은 묘하게 주변 사람들의 손과 어깨에 시선이 머물렀다. 꾸벅꾸벅 조는 옆자리 아저씨의 거칠어진 손마디, 짐을 가득 들고 힘겹게 버스 계단을 오르는 아주머니의 뒷모습. 강의실에서 배운 '관찰'이라는 단어가 머리가 아닌 눈으로 먼저 실천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대자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밤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치매 강의에서 들었던 '지워져 가는 생의 마지막 페이지'라는 말이 자꾸만 뇌리를 맴돌았다. 누군가의 기억이 희미해질 때, 그 곁을 지키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숭고하고도 무거운 일인가. 2월의 밤바람은 여전히 매서웠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낮에 다려놓은 셔츠의 온기 같은 것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현관문 너머, 아들의 투박한 응원
도어락 소리와 함께 조심스레 들어선 집안, 거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주방 한편에 작은 미등이 켜져 있었다. 늦게까지 공부를 하던 아들이 기척을 느끼고 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 이제 와? 고생했네."
평소라면 무뚝뚝하게 지나쳤을 아들이 내 손에 들린 묵직한 실습 가방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슬며시 다가왔다. "내일부터 실습 나간다면서? 이거 아까 편의점 갔다 오다 생각나서 샀어." 아들이 내민 것은 비타민 음료 한 병과 손등에 바를 작은 핸드크림이었다.
"공부하느라 손톱까지 바짝 깎고 고생하는 거 다 알아.
엄마 성격에 너무 열심히 하다가 몸 상하지 말고, 잘 다녀와. 우리 엄마 같은 사람이 돌봐주면 어르신들도 좋아하실 거야."
아들의 투박한 격려 한마디에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내 짧아진 손톱을 신기한 듯 바라보던 아들의 눈빛에는 대견함과 걱정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 따뜻한 시선을 뒤로하고 화장실로 향해 비누 거품을 냈다. 세면대 위에 놓인 짧아진 손톱이 전등 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였다. 아침에 손톱 줄로 매끄럽게 다듬어 놓은 덕분에 손끝을 문질러봐도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보드라웠다.
자정의 리허설: 2월의 마지막 밤을 지나며
잠자리에 들기 전, 방 한편에 걸어둔 실습복을 다시 한번 살폈다. 아들이 준 비타민 음료를 한 모금 마시자 상큼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졌다.
정갈한 복장: 구김 없이 펴진 깃을 만져보며 내일의 첫인상을 가다듬었다.
마음의 준비: "안녕하세요, 어르신. 오늘부터 함께할 실습생입니다."
거울을 보며 나직하게 내뱉은 첫인사는 생각보다 떨리고 어색했다. 하지만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 보이자, 거울 속의 나는 아침보다 훨씬 단단해진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정이 다 된 시간, 이불속에 누웠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으로는 이따금씩 쌩쌩 소리를 내며 바람이 지나갔다. 내일모레, 저 바람을 뚫고 실습지로 향할 것이다. 실습 가방 안의 물병처럼 내 마음도 가족의 응원과 묵직한 책임감으로 꽉 차 있었다. 어르신들의 무너진 기억과 약해진 육체를 지탱해 줄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다는 다짐. 2월의 찬 공기는 여전히 겨울의 꼬리를 붙잡고 있었지만, 짧아진 손톱 끝에서 느껴지는 이 생소한 감각이야말로 내 인생에 찾아올 새로운 봄의 전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