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위한 마지막 매듭

by 뽀송드림 김은비

거실의 여운, '어르신'이 된 아들

한바탕 '일으키기 실습'을 마친 거실 바닥에는 여기저기 교본이 흩어져 있었다. 엉덩방아를 찧을 뻔하며 웃어대던 아들은 어느새 제 방으로 들어갔고, 집안에는 다시 2월의 나른한 오후 햇살이 길게 드리워졌다. 아들의 묵직한 체중을 견뎌냈던 팔 근육이 기분 좋게 뻐근했다. "엄마, 무릎을 더 굽혀야 허리가 안 나가지!" 하던 녀석의 잔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혼자 픽 웃으며 다시 한번 거울 앞에서 자세를 잡아보았다. 국자를 쥐던 손이 누군가의 삶을 부축하는 손으로 변해가는 과정, 그 생생한 낯섦이 나쁘지 않았다.


가방을 열어 확인하는 '내일의 결심'

저녁을 준비하기 전, 현관 앞에 이미 챙겨두었던 실습 가방을 다시 가져와 소파 위에 올렸다. 며칠 전부터 꼼꼼히 싸두어 더 넣을 것도 없었지만, 내일이 진짜 실전이라 생각하니 자꾸만 지퍼를 열어 확인하고 싶어졌다.


지퍼를 열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빳빳하게 다려놓은 실습복이었다. 그 옆으로는 혹시 몰라 두 번 점검한 초침이 있는 손목시계, 그리고 손에 익은 필기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가방 앞 주머니, 가장 손이 잘 닿는 곳에 얌전히 자리 잡은 핸드크림.


그저께 금요일 저녁이었나. 실습 나간다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나를 보며 아들이 툭 내밀었던 물건이다. "엄마, 거기 가면 손 엄청 씻을 텐데 이거 발라요. 향도 좋아." 무심한 척 건네던 녀석의 따뜻한 마음이 튜브 끝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뚜껑을 열어 코끝에 가져다 대니 은은한 꽃향기가 번졌다. 내일 누군가의 마른 손을 잡을 때, 이 향기가 내 긴장뿐 아니라 그분의 외로움도 조금은 달래주지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보았다.


스승님의 응원, 그리고 단체 사진 속의 미소

잠시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켰다. 이번 평일 수업을 무사히 마치고 종강했다는 소식을 스승님께 전하며, 마지막 날 동기들과 다 함께 찍었던 단체 사진을 전송했다. 사진 속의 우리는 모두 조금은 수줍고, 또 조금은 비장한 표정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늘 내 삶의 이정표가 되어주시는 스승님께 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금세 답장이 도착했다.


"수고했어요. 이제 실습 잘 하고 시험공부도 열씨미 해요."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속엔 새로운 도전에 나선 제자를 향한 스승님의 든든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열씨미'라는 정겨운 오타 섞인 격려를 보니, 혼자 이 길을 걷는 게 아니라는 확신이 차올랐다. 내일 실습지에서 마주할 낯선 순간들도 스승님의 따뜻한 격려 한마디를 마음의 부적처럼 품고 간다면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짧아진 손톱 끝에 맺힌 정성

저녁 식탁을 차리며 물에 젖은 내 손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바짝 깎아버린 손톱 끝이 조금 어색했지만, 그 덕분에 손가락 끝에 닿는 모든 것들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배추를 썰 때도, 그릇을 옮길 때도 손가락 끝에 닿는 감각이 유독 예민했다.


'내일은 이 손끝으로 어르신의 맥박을 느끼고, 구겨진 옷깃을 조심스레 펴 드려야지.'


아직 가보지 않은 실습지의 풍경이 거실 창밖 너머로 그려졌다.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오늘 아침 아들에게 끓여준 부드러운 배춧국과 스승님이 보내주신 응원 같은 마음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2월의 토요일 밤, 마지막 준비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며 창문을 살짝 열었다. 2월의 밤공기는 여전히 날카롭게 파고들었지만, 가방 속 핸드크림의 온기와 아들의 장난 섞인 응원, 그리고 스승님의 든든한 메시지가 온 집안을 따뜻하게 채우고 있었다.


"엄마, 내일 몇 시에 나간다고? 알람 맞췄어?"


거실 불을 끄러 나온 아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응, 다 됐어. 가방도 세 번이나 확인했는걸. 걱정 말고 너나 늦잠 자."


방 안으로 들어와 누우니 어둠 속에서 실습 가방의 실루엣이 든든한 보초처럼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일은 정말 실전이다. 짧아진 손톱만큼이나 마음도 단단하게 다듬어졌다. 2월의 찬 바람도 이겨낼 만큼, 내 손 안의 온도는 이미 충분히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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