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닦고 다시 펜을 잡은 어젯밤, 책상머리에 머물던 봄바람은 내 꿈속까지 따라와 포근한 휴식을 선물했다. 공동작가가 되었다는 안도감은 지독했던 불면증마저 녹여버렸고, 나는 오랜만에 깊고 단 잠을 자고 개운하게 눈을 떴다.
아침 6시, 평소 같으면 전쟁터 같았을 주방이 오늘따라 유난히 고요하고 다정하다. 식빵을 촉촉한 계란물에 충분히 입히고, 올리브유를 두른 지글거리는 팬 위에 다시 버터를 녹여 식빵을 굽는다. 노릇하게 익어가는 토스트 향기가 집안 가득 퍼질 때쯤, 부스스한 머리의 아들을 불러 앉혔다. 따뜻한 계란 토스트와 우유 한 잔. "아들, 5분만 더 자면 지각이야!"를 외치던 전쟁 대신, 오늘은 "오늘 하루도 힘내, 아들"이라며 듬직한 등을 가볍게 토닥여 다정하게 배웅했다. 나 역시 나를 위한 토스트와 우유로 에너지를 채웠다.
오늘은 조금 특별해지고 싶은 날이다. 욕실 거울 앞에서 젖은 머리를 정성스레 말리고 롤을 말아 볼륨을 살렸다.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단정한 정장풍 원피스를 꺼내 입고, 평소 안 하던 화장을 연하게 했다. 거울 속의 나는 고단한 3학년 만학도가 아니라, 이제 막 첫발을 떼는 설레는 작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숄더백을 메고 구두를 신고 나서는 발걸음이 경쾌하게 복도를 울린다.
신데렐라의 출근길과 3시의 마법
출근길,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보니 아직 꽃망울은 커녕 가지 끝이 발그레해지지도 않은 겨울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하지만 저 앙상한 가지 속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봄을 준비하고 있을지, 밤마다 전공 서적과 원고 사이를 오가던 나는 안다. 저 나무들도 나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을 삼키며 오늘을 기다렸으리라.
회사에 들어서자 동료들이 의아한 듯 쳐다본다.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분위기가 확 달라지셨네!"라는 말에 그저 수줍게 웃어 보였다. 시간제 근무로 전환한 뒤의 삶은 내게 귀한 '숨구멍'이다. 오전 내내 집중해서 업무를 처리하고, 점심시간엔 동료들과 가벼운 수다를 떨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긴다. 오후 3시, '신데렐라'의 퇴근 시간이 되어 사무실을 나서는 발걸음이 예전보다 훨씬 가볍다.
집에 돌아와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하고 아들이 집으로 돌아와서 먹을 야채볶음밥을 준비해 두고 양치를 마쳤다. 이제는 학교에 갈 시간. 숄더백을 고쳐 메고 다시 구두를 신었다.
눈비 섞인 저녁, 강의실의 풍경
학교로 향하는 길, 하늘에선 차가운 눈과 비가 섞여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바람은 강하지가 않아서 우산이 버텨주었다. 강의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학교 카페에서 따뜻한 카페라테를 테이크아웃했다. 강의실 옆 휴게실 소파에 앉아 요즘 틈틈이 읽고 있는 책을 폈다. 정장풍 원피스를 입고 책을 읽는 모습 때문인지, 지나가던 젊은 학생들이 나를 보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그 맑은 인사가 내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다.
강의실 문을 열자 교수님께서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하셨다.
"뽀송드림님, 작가 되시더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셨네요! 얼굴에 빛이 납니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동안의 나의 안부를 물어보시며 박카스를 건네주셨다.
교수님의 칭찬에 강의실 안 공기가 일렁였다. 오늘은 다른 학과 학생들과 함께 듣는 수업이라 교수님께서는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시키셨다. 내 차례가 되어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사회복지학과 3학년 이고, 필명 뽀송드림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노인복지에 관심이 있어서 방학 동안 요양보호사 교육과정을 수료했고 실습하고 있습니다. 개인 산문시집을 출간을 했고 이번에 공동작가로 선정이 되어서 공동 시집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소개가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멋지다", "와... 글을 쓴다는 게..." 하는 학우들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 교수님과 학우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내 시집을 검색해서 주문하기 시작했다.
"작가님, 저 방금 주문했어요! 다음 주에 꼭 사인해 주세요."
창밖엔 여전히 겨울나무를 적시는 차가운 눈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내 마음엔 이미 지지 않는 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