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의 전공 서적과 내 필명이 박힌 네 글자
3학년의 밤은 여전히 낮보다 뜨겁다. 회사에서의 엑셀 작업과 퇴근 후의 저녁 밥상, 그리고 밤늦은 시간.
전공 서적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며 1인 4역의 줄타기를 이어간다. 사실 나의 하루는 새벽부터 팽팽한 긴장감의 연속이다. 아침마다 고1 아들과 벌이는 등교 전쟁이 그 서막이다. "아들, 5분만 더 자면 지각이야!"를 외치며 덜 깬 아들을 식탁 앞에 앉혔다. 덜 깬 눈으로 식탁에 앉아 주먹밥과 시리얼을 한 그릇 비워내는 아들의 가방을 챙겨 주고 현관 문을 나서는 것을 보고 나면, 나 역시 출근 준비를 마치고 비장한 각오로 회사로 향한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어제의 '작가'도 밤새 씨름하던 '대학생'도 잠시 서랍 속에 넣어둔다. 내 책상 위엔 전공 서적 대신 복사 용지 뭉치와 처리해야 할 전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숫자 나열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오늘 하루를 버텨내야 할 '무기'들이다.
"저, 이 서류들 오후 2시까지 데이터 정리 좀 부탁드려요."
상사의 짧은 지시와 함께 엑셀 작업이 시작된다. 복지 현장의 따뜻한 이야기나 시적인 은유가 끼어들 틈은 없다. 오직 함수, 그리고 정확한 타이핑 소리만이 사무실의 정적을 깨운다. 이름 모를 업체들의 사업자 번호를 입력하고, 영수증 금액이 일치하는지 확인하며 엑셀 칸을 채워 나간다.
단순 반복 업무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시간은 나에게 가장 치열한 '자아 분리'의 시간이다. 손가락은 기계적으로 숫자를 치고 있지만, 머릿속 한편에서는 아침에 아들에게 못다 한 잔소리와 어젯밤 읽다 만 전공 용어들이 둥둥 떠다닌다.
잠시 눈이 침침해질 때면 모니터 옆에 붙여놓은 작은 메모지를 본다.
[지금까지 잘 해 왔듯이 앞으로도 할 수 있어]
누군가는 "그냥 대충 하고 쉬지, 왜 사서 고생이냐"고 묻는다. 하지만 이 지루한 숫자 입력이 나를 지탱하는 현실의 발판임을 안다. 꼬박꼬박 채워 넣는 엑셀 셀 하나하나가 결국 내 생활비를 만들고, 아들의 주먹밥이 되고, 내가 시를 쓸 수 있는 최소한의 평화를 보장해 준다는 것을.
오후 2시, 마지막 데이터 검수를 끝내고 '저장' 버튼을 누른다. 엑셀의 초록색 창을 닫으며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제 곧 '사무보조 알바생'의 허물을 벗고, 다시 전공 서적을 든 '3학년'이자 '작가'로 돌아갈 시간이다. 3시 정각, 가방을 챙겨 일어나는 내 등 뒤로 엑셀 숫자가 아닌, 오늘 밤 써 내려갈 시의 첫 구절이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하다.
'신데렐라'처럼 퇴근 시간에 맞춰 사무실을 나설 때면 동료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을 뒤로하지만, 사실 그때부터 제2의 출근이 시작된다는 걸 그들은 알까.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던져두고 저녁거리를 고민하며 전공 서적을 훑어보는 일상. 이론은 머리로 외우지만, 현장의 변수들은 가슴으로 받아내야 하기에 수업 내용을 필기하며 어르신들의 얼굴을 그 위에 겹쳐본다. 조금이라도 시간 여유가 생기면 스승님을 찾아뵙고 이 깊은 고민을 나누리라 다짐하며, 나만의 아이디어 노트에 생각을 꾹꾹 눌러 담는다.
사실 지난 2월은 내게 유독 잔인하고도 설레는 달이었다. 정성껏 써 내려간 시를 모아 출판사에 제출하고 나서, 나는 일부러 마음을 비워두었다. 워낙 글 솜씨가 뛰어난 분들이 많다는 걸 잘 알기에, 괜한 기대로 실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안과 무심함 사이를 줄타기하며 며칠을 보냈을까.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던 3월의 오후 6시 30분. 핸드폰 화면에 공동 작가 명단이 올라왔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올리는데, 아른거리는 글자들 사이로 익숙한 필명 네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게다가 내가 며칠 밤을 신중하게 고르고 또 골랐던 그 표지가 당당히 채택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 참았던 무언가가 툭 하고 터져버렸다.
전자책과 종이책 출간 확정. 그 한 줄의 문장이 눈물로 번져 시야를 가렸다. 기쁨보다 먼저 터져 나온 것은 안도감이었고, 그 안도감은 이내 뜨거운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신없이 번호를 눌러 스승님께 전화를 걸었다.
"스승님... 흑, 저 됐어요... 저 됐어요...!"
목소리는 이미 푹 젖어 있었고 문장은 엉망이었다. 수화기 너머 스승님의 당황 섞인, 그러나 인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됐는데... 뭐가 됐는지 말을 해야 내가 알지!"
"공동 작가 되었어요. 스승님... 잘 쓰시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마음 비우고 있었거든요.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너무 불안했는데... 확인하니까 너무 기뻐요. 다 스승님께서 격려해 주시고 매일 기도해 주셔서 된 거예요."
내 울먹임 섞인 고백에 스승님은 허허 웃으시며 특유의 단단한 말투로 대답하셨다.
"당연하지. 아휴, 잘됐다. 고생했다. 기도해라."
그 짧은 "당연하지"라는 말씀이 세상 그 어떤 축사보다 든든하게 내 가슴에 꽂혔다. 내가 길을 잃지 않게 붙들어주신 기도의 힘이 3월의 선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이제 내 책상 위에는 전공 서적과 함께 곧 세상에 나올 내 책의 원고가 나란히 놓여 있다. 통합돌봄을 공부하며 누군가의 노후를 설계하는 마음과, 시를 쓰며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 이 두 갈래의 길은 결국 '사랑'이라는 하나의 종착역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눈물을 닦고 다시 펜을 잡는다. 공동작가가 된 기쁨을 원동력 삼아, 이제는 어르신들의 안녕한 밤을 위한 더 단단한 공부를 이어가야겠다. 3월의 봄바람이 벌써 책상 끝머리에 와 닿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