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립과 6과목의 전쟁: 3학년의 '갓생' 서막

by 뽀송드림 김은비

어제의 비바람은 간데없고, 화요일 아침은 야속할 정도로 눈부셨다. 주말 내내 실습처에서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이 스승님이 사주신 명태조림 한 그릇에 녹아내린 것도 잠시. 자고 일어나니 다시 '전사'의 갑옷을 입어야 할 시간이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아들의 교복 깃을 빳빳하게 세워 등교시키고 나니, 나 역시 출근 전쟁터로 향할 채비가 끝났다.

익숙한 근무지지만 오늘부터는 오후 3시까지의 시간제 근무로 일과가 재편되는 날. 거울 앞에 서서 드라이용 고데기를 들었다. 정수리에 한껏 볼륨을 넣고, 어제의 차분한 브라운 대신 오늘은 작정하고 생기 넘치는 레드 빛 립을 골라 정성껏 발랐다. 한 아이의 엄마이자 사무보조 아르바이트생, 그리고 대학생이라는 1인 다역을 수행하기 위한 나만의 '전투 화장'이었다. 붉게 물든 입술을 보니 비로소 "자, 가보자!" 하는 기합이 들어갔다.

사무실 모니터 앞에 앉아 엑셀 시트와 서류 더미 사이를 오가며 업무를 처리하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 시계는 운명의 오전 10시를 향해 무섭게 달려가고 있었다. 업무의 흐름을 깨지 않으면서도 가장 기민하게 손가락을 놀려야 하는 일생일대의 순간. 9시 59분, 마우스를 쥔 손에 땀이 뱄다. 10시 정각, 화면이 바뀌자마자 전공과 교양의 경계에서 신들린 듯한 '광클'을 이어갔다.

의료사회복지론, 사회복지법제와 실천, 정신건강사회복지론, 영어회화 1, 평생교육론, 교육사회학. 이름만 들어도 전공 서적의 두께가 가늠되는 6과목을 무사히 바구니에 담아냈다. '신청 완료'라는 네 글자가 모니터에 뜰 때,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엑셀 창 구석에 몰래 적어둔 강의 시간표를 훑어보며, 17과목 강행군을 소화하시는 스승님께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겠노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 탕비실에서 마시는 종이컵 커피 한 잔이 오늘따라 샴페인보다 달콤했다.

오후 3시, 꼬박 채운 근무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발걸음이 가벼우면서도 무거웠다.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늦은 오후. 대충 허기를 달래려 늦은 점심을 욱여넣고 나니, 커피 한 잔의 여유보다 더 시급한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 위에 대자로 누워있는 요양보호 실기 기출문제집. 어제 실습지에서 어르신께 꼬집혔던 손목의 멍울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책 속의 이론들은 너무나 정갈하고 평화로웠다.

"어르신, 책에서는 '수용과 공감'이 정답이라는데... 제 손목 꼬집으신 건 어떤 감정을 수용해 드려야 했던 걸까요?" 책장 너머로 어제 만난 어르신의 주름진 얼굴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론은 정답을 가르치지만, 현장은 사랑을 시험한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오후 내내 기출문제와 씨름하며 펜을 굴리느라 손가락 마디가 뻐근해질 때쯤, 다시 고데기를 들었다. 오전의 레드 립은 조금 지워졌지만, 그 위에 다시 한번 선명한 핏빛 열정을 덧칠했다. 3학년 개강 OT를 향한 두 번째 선전포고였다.

학교로 향하는 야간 버스 안,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은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사망년'이라 불리는 3학년의 무게감은 교수님의 OT 설명 한마디 한마디에 묻어났다.
"이제 여러분은 단순한 학생이 아니라 현장을 고민하는 예비 전문가입니다."
그 말씀에 어깨가 으쓱해지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웅장해졌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아들과 마주 앉아 늦은 저녁을 먹으며 오늘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수강 신청의 0.1초 승부사 기질부터, 사무실에서 엑셀 업무와 법조문 암기 사이를 줄타기하던 스릴 넘치는 순간까지. 아들은 입안 가득 밥을 문 채 "엄마 진짜 갓생 사네, 인정!"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투박한 칭찬 한마디에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이제 집안일을 정리하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내일의 업무와 공부를 준비하며 펜을 든다. 지워진 레드 립을 깨끗이 닦아내고 영양 크림을 듬뿍 바르는 이 시간이 나에게는 내일을 위한 가장 거룩한 주유 시간이다.

스승님이 사주신 명태조림의 매콤한 기운과 오늘 내가 바른 레드 립의 당당함.
글 쓰고, 살림하고, 공부하며 일까지 해내는 이 치열한 3학년의 기록들이 모여 언젠가 나의 이름표를 가장 눈부시게 빛내줄 것이다.

"화이팅이다. 3학년의 밤은 낮보다 훨씬 뜨거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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