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 팔레트와 명태조림

by 뽀송드림 김은비

주말 내내 요양원과 주간보호센터에서 실습을 하며 팽팽하게 당겨졌던 몸의 긴장이 월요일 대체공휴일의 정적 속에서 비로소 느릿하게 풀려났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된장국의 구수한 향이 집안을 채우고, 붉은 양념에 무친 게장이 식탁 위에 올랐다. 이제 곧 고등학생이 될 아들의 점심을 챙겨두고 나서야, 비로소 '나'를 돌볼 틈이 생겼다.


실습 기간만큼은 연락 한 번 없이 '쿨하게' 버텨보겠다던 다짐은, 스승님이 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지난 금요일 저녁 7시 30분쯤 바쁘실 줄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카톡을 보냈다.


"스승님, 안녕하세요! 다음 주에 잠깐 찾아뵙고 싶은데 괜찮으신지요. 학교 연구실과 교회 사무실 중 어디가 편하실까요? 일정 맞춰 가겠습니다!"


곧바로 돌아온 답장은 간결했다.

"다음 주 화요일 가능해요. 학교에서. 왜?"


"시간 많이 안 뺏을게요. 5분이면 돼요! 몇 시까지 갈까요?"


나의 조바심 섞인 물음에 스승님은 되레 다정한 제안을 건네셨다.

"그러면 월요일은 어때? 교회에서 점심이라도 같이 먹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야 너무 좋죠! 요즘 시간 여유 많아요. 시간만 알려주세요!"라는 대답에

"그럼 교회 사무실로 12시까지 와." 그리고 이어진 무심한 듯 따뜻한 "ㅇㅋ" 한 글자.

그 짧은 대화가 주말의 피로를 씻어내는 묘약이 되었다.


약속 당일, 화장대 앞에 앉아 작년에 스승님께 선물 받은 립 팔레트를 꺼냈다. 소중히 아껴두었던 칸에서 차분한 브라운 빛 색을 골라 정성껏 발랐다. 마스크 뒤에 숨겨두었던 실습생의 고단함을 지우고, 한층 생기 있고 당당해진 제자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저 잘 지내고 있어요, 스승님. 실습도 아주 성실히 잘 해내고 있답니다'라는 무언의 인사를 입술 끝에 머금은 채로.


전철로 딱 두 정거장 거리. 우산이 휘청거릴 만큼 거센 비가 쏟아졌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5분만 얼굴 뵙겠다던 제자에게 기꺼이 점심 식탁을 내어주신 분. 내게 스승님은 엄마 같은 존재였고, 나는 마흔이 되어서도 그분 앞에선 여전히 재잘거리는 딸이었다.


사무실 문을 열자 서류 더미 속에 파묻힌 교수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우산이며 가방을 내팽개치듯 던져두고 달려가 스승의 등을 뒤에서 덥석 안아버렸다.

"스승님, 저 왔어요!"

이 '마흔 살 제자'의 철없는 애교에 스승님은 "아이고, 왜 이래~"라며 시큰둥하셨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온기만큼은 숨기지 못하셨다. 그 따뜻함에 요양원에서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날 서 있던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근처 식당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명태조림을 마주하고 앉으니 그제야 시장기가 몰려왔다. 식사 전 스승님께서는 오랫만에 만난 제자를 위해 정성껏 기도를 해주셨다. 그 기도대로 나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열심히 즐겁게 행함을 하며 지내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매콤한 명태 살을 발라 먹으며 그동안 쌓아둔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실습지에서 어르신께 손목을 꽉 꼬집혔던 일부터, 요즘 시집을 팔고 있는 소소한 근황까지. 스승님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내 모든 말을 경청해 주셨다.


"고생 많았네. 손목 아픈 것보다 어르신 마음부터 살피는 걸 보니 이제 조금씩 전문가가 되어 가고 있어. 얼굴도 훨씬 좋아 보이고, 하루 세끼 다 잘 챙겨 먹고 체력이 제일 중요해"


투박하지만 진심 어린 격려에 코끝이 찡해졌다. 남을 돌보느라 정작 내 마음의 허기는 돌보지 못했는데, 스승님이 건네준 위로 한마디에 비로소 마음이 가득 찼다. 선물해 주신 립 색깔은 명태조림 양념에 조금 지워졌을지 몰라도, 그분이 주신 사랑은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가슴에 남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비바람은 여전했지만 마음은 뽀송뽀송했다. 내일 아침이면 고등학생 아들을 씩씩하게 등교시키고, 오전 10시에는 긴박한 수강 신청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야간 대학 개강이다.

스승님께서는 일반 학부 생들, 야간 4학년 학부 생들, 대학원생들 강의로 수업이 꽉 차셨다. 17과목이라니... ...

스승님을 위해 매일 기도를 드려야겠다.


오늘 먹은 명태조림의 매콤한 기운과 스승님의 따뜻한 눈빛은 앞으로 마주 할 수많은 날을 버티게 할 든든한 양식이 될 것이다. 자, 이제 또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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