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Sep 09. 2020

남편이 바람나면 어쩌려고?

90년대 주말드라마 상황극은 이제 그만

지금은 돌아가신, 시대의 이야기꾼 박완서 소설가의 작품 중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라는 소설이 있다. 읽다가 없던 암도 생길 것 같은 스토리지만 마지막에는 시쳇말로 '사이다 결말'을 선사하는 작품인데, 그 주요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문경은 혁주와 결혼을 꿈꾸고 심지어 결혼 약속도 하지만(그러나 거의 첫 페이지부터 혁주는 싹수가 노란데 뭘 보고 결혼을 꿈꿨냐), 혁주는 부유한 애숙과 결혼하기 위해 그녀를 저버린다. 문경은 혼자 출산을 하고 아들을 키우지만, 혁주는 애숙이 아들을 낳지 못하게 되자 문경의 아들을 뺏어오기로 한다. 여차저차하여 문경은 아들을 지킬 수 있게는 되지만 그 과정이 참으로 지난하다. 책 읽다 가슴 부여잡고 쓰러질 지경




MBC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던 - 문경이 배종옥, 혁주가 故조민기 배우였다 - 이 작품은 문득 나에 대한 고모의 걱정을 불러 일으켰다.


다만, 포커스는 '자식을 못 낳게 되어 남편의 전 애인이 낳은 아들을 찾으러 가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보아야 하는 애숙'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 봐라, 자식이 있어도 아들이 없으니까 남자가 이러잖냐. 넌 자식 자체가 없는데 어떡하니. 자식 없어서 나중에 남편이 바람 피우면 어쩔 거야. 」

「 저거 90년대 소설 아니에요? 」

「 90년대건 2020년이건 사람 마음이란 다 똑같은 거야 」

「 저건 남자가 그냥 나쁜 놈인 거 같은데요 」


그와 상관없이 큰 고모는 나름의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 자식이 있어야 위기 상황에서도 부부를 이어 주는 끈이 있는 거야. 너희가 지금은 좋지? 나중에 서로가 싫어지는 날이 오면 어쩔래? 그럴 때 자식이 있으면 그냥 참고 사는 거야. 안 그러면 아쉬울 게 뭐 있냐, 그냥 이혼하는 거야. 그런 건 너무 슬프잖니. 」




사실 이 걱정은 생각보다 더 많이 듣는 이야기다.


비단 딩크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부부의 관계'에 대한 말이 오갈 때 '자식이 주는 부부 사이의 안정감 & 이혼 방지'는 꽤 많이 인용된다. 실제 주변에서도 '남편과 정말 가족이 되었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아이가 생기고 나니까 진짜 가족같아졌다' 든지 '남편이 미웠지만 자식을 보고 산다' '이혼할까 싶다가도 아이를 보면 또 희망이 생기고 그런다'는 말을 듣곤 했다.


두 존재 사이에 생긴 새로운 생명, 그 아이가 이어주는 두 사람의 새로운 관계와 그 끈끈함에 대해서 반박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나와 Y 사이의 유대감을 위해,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이 부부 관계를 놓아 버리지 않기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는 전혀 다른 문제다. 유대감은 관계에서 정말 중요한 사항이지만, 아이를 낳는 것은 유대감을 쌓는 많은 방식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효과가 매우 큰 것은 사실이겠지만.


부부 사이의 마음, 그리고 정(情)은 인생에서 만나는 많은 사건을 함께 겪고 결정하면서 차차 축적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출산과 육아, 양육을 하면서 쌓이는 마음도 있을 것이고, 그 외의 일에서 생겨나는 것도 분명 있겠지. 나는 우리 부부가 지금까지 아이 없이도 순조롭게 마음을 교류해 왔고, 앞으로도 그 시간들이 계속 쌓여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 서로가 미운 상황에서도 부부의 끈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아이의 역할이라면, 과연 그 상황에 놓인 아이의 마음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정말로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게 되었다면 부부, 그리고 아이를 위해서도 궁극적으로 좋은 선택이 무엇일까 - 어려운 문제다 싶기도 하다.




내가 자꾸 말을 안 듣고 반박하자 큰 고모는 결국 '말이 안 통한다, 아직 세상을 안 살아봐서 모른다'고 한숨을 쉬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강렬한 또 하나의 코멘트와 함께.


「 그래, 그럼 돈줄이라도 니가 쥐고 있어라. 그러면 바람이 나려고 해도 웬만하면 돈 없어서 못 나. 」


...네, 조언 고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혼주의자의 결혼, 딩크의 출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