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주말드라마 상황극은 이제 그만
지금은 돌아가신, 시대의 이야기꾼 박완서 소설가의 작품 중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라는 소설이 있다. 읽다가 없던 암도 생길 것 같은 스토리지만 마지막에는 시쳇말로 '사이다 결말'을 선사하는 작품인데, 그 주요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문경은 혁주와 결혼을 꿈꾸고 심지어 결혼 약속도 하지만(그러나 거의 첫 페이지부터 혁주는 싹수가 노란데 뭘 보고 결혼을 꿈꿨냐), 혁주는 부유한 애숙과 결혼하기 위해 그녀를 저버린다. 문경은 혼자 출산을 하고 아들을 키우지만, 혁주는 애숙이 아들을 낳지 못하게 되자 문경의 아들을 뺏어오기로 한다. 여차저차하여 문경은 아들을 지킬 수 있게는 되지만 그 과정이 참으로 지난하다. 책 읽다 가슴 부여잡고 쓰러질 지경
MBC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던 - 문경이 배종옥, 혁주가 故조민기 배우였다 - 이 작품은 문득 나에 대한 고모의 걱정을 불러 일으켰다.
다만, 포커스는 '자식을 못 낳게 되어 남편의 전 애인이 낳은 아들을 찾으러 가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보아야 하는 애숙'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 봐라, 자식이 있어도 아들이 없으니까 남자가 이러잖냐. 넌 자식 자체가 없는데 어떡하니. 자식 없어서 나중에 남편이 바람 피우면 어쩔 거야. 」
「 저거 90년대 소설 아니에요? 」
「 90년대건 2020년이건 사람 마음이란 다 똑같은 거야 」
「 저건 남자가 그냥 나쁜 놈인 거 같은데요 」
그와 상관없이 큰 고모는 나름의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 자식이 있어야 위기 상황에서도 부부를 이어 주는 끈이 있는 거야. 너희가 지금은 좋지? 나중에 서로가 싫어지는 날이 오면 어쩔래? 그럴 때 자식이 있으면 그냥 참고 사는 거야. 안 그러면 아쉬울 게 뭐 있냐, 그냥 이혼하는 거야. 그런 건 너무 슬프잖니. 」
사실 이 걱정은 생각보다 더 많이 듣는 이야기다.
비단 딩크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부부의 관계'에 대한 말이 오갈 때 '자식이 주는 부부 사이의 안정감 & 이혼 방지'는 꽤 많이 인용된다. 실제 주변에서도 '남편과 정말 가족이 되었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아이가 생기고 나니까 진짜 가족같아졌다' 든지 '남편이 미웠지만 자식을 보고 산다' '이혼할까 싶다가도 아이를 보면 또 희망이 생기고 그런다'는 말을 듣곤 했다.
두 존재 사이에 생긴 새로운 생명, 그 아이가 이어주는 두 사람의 새로운 관계와 그 끈끈함에 대해서 반박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나와 Y 사이의 유대감을 위해,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이 부부 관계를 놓아 버리지 않기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는 전혀 다른 문제다. 유대감은 관계에서 정말 중요한 사항이지만, 아이를 낳는 것은 유대감을 쌓는 많은 방식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효과가 매우 큰 것은 사실이겠지만.
부부 사이의 마음, 그리고 정(情)은 인생에서 만나는 많은 사건을 함께 겪고 결정하면서 차차 축적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출산과 육아, 양육을 하면서 쌓이는 마음도 있을 것이고, 그 외의 일에서 생겨나는 것도 분명 있겠지. 나는 우리 부부가 지금까지 아이 없이도 순조롭게 마음을 교류해 왔고, 앞으로도 그 시간들이 계속 쌓여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 서로가 미운 상황에서도 부부의 끈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아이의 역할이라면, 과연 그 상황에 놓인 아이의 마음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정말로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게 되었다면 부부, 그리고 아이를 위해서도 궁극적으로 좋은 선택이 무엇일까 - 어려운 문제다 싶기도 하다.
내가 자꾸 말을 안 듣고 반박하자 큰 고모는 결국 '말이 안 통한다, 아직 세상을 안 살아봐서 모른다'고 한숨을 쉬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강렬한 또 하나의 코멘트와 함께.
「 그래, 그럼 돈줄이라도 니가 쥐고 있어라. 그러면 바람이 나려고 해도 웬만하면 돈 없어서 못 나. 」
...네, 조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