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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Sep 07. 2020

까랑까랑, 은근히 성깔 있는 녹차

여섯 가지 차, 여섯 가지 매력 Ⅲ

○ 차와 사람 시리즈  왠지 글이 다 시리즈다

1. 순수하지만 강인한 백차

2. 까랑까랑, 은근히 성깔 있는 녹차




지금은 거의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내 생애 첫 번째 티타임은 막내 고모와 함께였다. 아마도 중학생 때였던 것 같고, 어린 눈에도 예뻐 보였던 작은 찻잔에 따라 주는 연둣빛 찻물이 고왔다. 조금 뜨겁긴 해도 고소하고 정말 맛있다고 생각했던 단편적인 기억만이 남아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녹차였던 것 같다. 그리고 고모는 꽤 괜찮은 다구를 가지고 제대로 우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도.


사실 막내 고모를 좋아한 적은 없다. 신경질이 많고 투정도 심하던 고모는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할머니와 엄마가 제사 지내는 일로 다투던 그 때, 전화를 낚아채면서 엄마에게 심한 말을 했던 고모를 엄마는 아직도 완전하게는 용서하지 않은 것 같다. 한참 손아랫 시누이, 업어서 키웠다고 할 수도 있을만큼 나이 차이가 나고 엄마에게 물심양면으로 신세를 많이 진 고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댁 식구 중 많이 사랑받던 막내 여동생이었다는 이유로 그렇게나 엄마에게 당당하게 짜증을 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시집을 간다며, 조금 머리가 벗겨지려고 하지만 큼직한 눈에 부드러운 입매가 나쁘지 않았던 신랑감을 데리고 왔다. 서울로 시집을 간 고모는 시댁 식구가 적다고 - 시아버지도 없고 시집살이 시키는 시어머니도 아니었다고 했다. 그게 얄미웠던지 엄마는 '자기네 딸은 그토록이나 고르고 골라서 시집살이 안 할 곳으로 보낸다'며 투덜댄 적도 있었다.


그랬던 고모를 제대로 다시 만난 것이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여름, 아니 봄이었던가. 미운 사람이라도, 내 엄마에게 제대로 못했던 사람이라도, 엄마를 잃은 딸을 보는 것은 마음 아팠다. 내가 내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고모도 할머니를 사랑했겠지. 게다가 그렇게나 애지중지 사랑받던 막내딸. 눈물이 나지 않았고, 사실 슬프지도 않았던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온 얼굴이 퉁퉁 부어 가며 울던 세 명의 고모는 내게 그렇게나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처음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었다.


고모가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나중에 들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나에게라도 힘든 일 있으면 말하고 그러라고, 엄마가 위로했더니 울면서 언니가 그렇게 말해주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마음은 약하고 신경질이 많지만 아이같은 자존심은 강한 사람. 막내 고모는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상대가 다시 다가와 주길 기다렸다가, 포기했다가, 오기가 생겼다가 그냥 잊고 마는 그런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모와 심정적으로 다시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다시 가까워질 기회도 없었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차를 떠올릴 때마다 어린 시절, 고모가 내게 대접했던 그 작은 찻자리가 생각나는 것도 사실이다.



녹차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차 중 하나지만, 사실 그 맛과 향이 매우 강력해서 호불호가 있는 차이기도 하다.


'카랑카랑한 성질을 가진 차'로 녹차를 표현했는데, 내게 있어 녹차는 확실히 그런 느낌이다. 여리여리해 보이는 찻물이나 상쾌해 보이는 연둣빛에 비해 맛있게 우리기가 쉽지 않고, 어느 향기와 섞어 놓아도 녹차의 성질을 드러낸다.



녹차는 '살청'이라는 과정을 거치는데, 인위적으로 산화를 막아버리는 것이다. 찻잎을 딴 후 가만히 두면 자연스럽게 산화가 시작되는데, 그 산화 과정을 진행시키는 효소를 없애면 찻잎의 색이 푸르게 유지된다.


오설록 매장을 가끔 지나다 보면 큰 솥에서 찻잎을 가지고 뭔가를 하는(!) 시연을 할 때가 있는데 이게 바로 살청 방법 중 하나인 '초청' 혹은 '덖는다'는 과정이다. 영어로는 Pan-frying이라고 한다. (왠지 한국어나 한자보다 영어가 더 이해가 잘 되는 이 느낌은)


일본 녹차도 '살청'은 똑같이 하는데, 보통 '증청'이라고 해서 찌는 형태를 취한다. 여기도 영어로 이해하면 더 쉽다. Steaming. 증청은 초청에 비해서 훨씬 찻잎 색깔이 푸릇푸릇하다. 일본차 특유의 그 쨍한 초록색이 바로 이 과정에서 생겨난다.


용정차 티타임(좌), 용정차 건엽(우)


유명한 녹차는 사실 워낙 많은데, 그 중 많이 알려졌고 유명한 것이 '용정차(= dragon well)'이다. 그 중에서도 '서호용정'이 제일 유명하며,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납작하게 눌려진 특색 있는 모양, 우렸을 때의 향긋함이나 구수함이 매우 매력적인 차다.


그러나 구수하고 푸릇푸릇하다고 해서 제대로 맛을 내는 것이 만만하지는 않고, 물의 양이나 온도가 잘 맞지 않으면 쓴 맛이 우러나기 쉽다. 또 이왕 쓴 맛이 나 버리면 맛을 보강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홍차의 경우에는 너무 쓰다 싶으면 우유를 붓거나 설탕을 넣어서 맛을 중화시킬 수 있는데, 녹차는 설탕도 우유도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튼 알면 알수록 까다롭고 어렵지만, 워낙 그 종류도 많고 향취가 매력적이라 계속 알아가고 싶어지는 차가 바로 녹차라고 할 수 있다. 쓰고 보니 막내 고모와는 좀 다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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