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또호레 Nov 20. 2021

결이 비슷한 사람

네가 잘 못 한 게 아니야.

 평범하고자 열심히 살아왔던 건 아니다. 하지만 살아보니 열심히 살아야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억지로 끌고 나가려 했던 인연들은 마른 손에 움켜쥔 모래알들처럼 내 손을 타고 바삐 흘러갔다. 작은 손에 분에 넘치게 쥐고 있었다. 한때 소중했던 사람들이 스쳐갔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 힘든 일이다.


 기억은 잃고 감정만 남아있다. 툭-치면 억 소리 내며 쓰러질 것 같았던 어릴 시절 내가 자라 겨우 지금의 내가 되었다. 마냥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어릴 때 이미 깨달았으면서 이제야 완벽한 행복을 바라는 거 보면, 지금 꽤 살만 해졌나 보다. 그래도 여전히, 여전히 방황 중.  



 학창 시절 우리 집으로 친구를 데려오는  꿈이었다. 친구와 함께 엄마가 챙겨주신 간식을 손에 쥐고 이방   돌아다니며 놀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12년을 월세로 살았던 우리 다섯 식구의 집은 15 남짓. 입장함과 동시에 눈짓  번으로 홈투어 가능한 작은 집은 친구들에게 가능한 끝까지 숨기고 싶은 곳이었다.


  그러나 작은 집 덕에 우리 가족은 방 문 닫아놓고 각자의 생활을 하는 법이 없었다.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아빠가 보는 9시 뉴스의 앵커 소리, 언니가 남자 친구와 통화하는 소리, 내일 아침을 준비하는 엄마의 칼질 소리, 동생이 하는 FIFA 게임의 함성소리가 조화롭게 작은 집을 가득 채웠다. 1층 주인댁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몇 년은 더 살고 이사하던 날, 가구가 빠진 자리를 곰팡이가 채운 텅 빈 집을 둘러보며 아빠는 말씀하셨다. "이런 곳에서 얘들을 다 키웠네.."

 


 우리 삼 남매의 사춘기 시절은 힘들었을까. 다행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 어려웠던 어린 시절 덕분에 생활력 강한 아이로 컸다. 수능도 끝나기 전 수시기간이 끝나자마자 집 가까운 곳에 원서를 던져버리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남들 다 가는 대학 못 가면 워킹홀리데이가 가고 싶었기 때문에 대학에 대한 큰 간절함이 없었다. 지금은 남들만큼 사는 게 목표인데, 그때는 이상하게 비주류를 지향했다. 26살 첫 직장을 잡기 전까지 19살부터 아르바이트를 했으니, 밥벌이 생활이 10년 차. 지난 10년 동안 작은 쉼표가 자잘 자잘하게 있긴 했으나 요새 드는 생각은 드디어 마침표 찍고 새로운 장을 펴내고 싶은 기분. 조금은 지친 걸까.

 좋은 점도 물론 있다.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한 지 10년 차가 다 되어가고, 400km 떨어진 곳에 살다 보니 부모님이 나에 대한 걱정이 훨씬 적어졌다. 너는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기분 좋은 믿음. 두 달에 한 번씩 본가에 갈 때마다 손님 대접받는 느낌이 썩 나쁘진 않다. 좋은 곳, 맛있는 것 먹으면 아빠가 찍어 올린 사진과 사랑스러운 조카 사진으로 가득 찬 단톡방이 따뜻하고, 심심하다며 이유 없이 연락 오는 엄마의 연락이 반갑다.




  사람을 꽤 좋아하는 편이라, 정말 그들이 보고 싶어서 내가 먼저 만남을 청했다가 막상 그날이 다가오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했다. 무자극의 상태에서 배나 긁적이며 TV를 보는 것을 극락으로 여기는 나 같은 사람은 일련의 시동이 필요하다.


 나와 비슷한 결의 사람들을 보면 반가움은 물론,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안도감, 그 성격으로 세상 살아남기 힘들겠다는 동정심 등이 맞물려 관심으로 이어졌다. 어릴 땐 나 같은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만나기가 어렵다. 나를 두고 다들 어찌 그렇게들 나아갔는지.. 현 직장에서 인류애 상실을 제대로 체험하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디게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에 이리도 뒤쳐졌을까. 아직은 조금 손해 보더라도 바보 같고 순수하고 그렇게 살고 싶은 걸. 이것도 회피의 일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인생의 쓴 맛을 보게될 것이라면, 그리고 내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면 천천히 스며들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