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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호레 Jul 20. 2021

마음보다 머리가 앞설 때

나이를 먹어갈수록 공감이 어렵다

 이혼, 사업실패 등 흔히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들을 안타깝다 여기는 것이 불편할 때가 있다. 내가 그들이 아니라서 안도하는 것이 진정한 위로라 할 수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딜레마에 빠진다. 머리가 굵어지니 마음으로 느끼는 안타까움이 전부가 아닐 때가 많다. 뉴스에 나오는 각종 사건의 피해자의 고통이 온전히 피의자 탓으로 돌려지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피해자인 그 혹은 그녀에게도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먼 뉴스까지 가지 않더라도, 가까운 사이에서도 위로와 공감은 어려운 일이 될 때가 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고통의 원인인 상사가 지금 나의 상사보다 괜찮은 사람일 때, 힘들어 죽겠다는 친구의 재정 상황이 나보다 나을 때 등등 ’ 내가 너보다 힘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면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위로는 가장 어려운 일이 된다.  






 나이가 들수록 이 행위는 더 어려워졌다. 어릴 때는 친구가 싫어하는 사람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고,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친구의 불평불만이 온전히 흡수 되질 않는다. 좋게 말하면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변한 것이겠지만, 나쁘게 말하면 공감하는 기능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30년 차 사회생활 만랩 직장인들처럼 뒤에서는 다시 안 볼 사람 흉보다가 겉으로는 10년 지기 친구처럼 웃고 떠드는 능력을 가진 위인은 되지 못해서 사회생활이 조금 더 힘들다고 느껴진다.



 과한 호의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 고맙긴 한데, 나한테 바라는 게 있나? 갑자기 청첩장 보내는 거 아니야..? 라는 옹졸한 의문.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이럴 때마다 평소 내 모습을 뒤돌아 보게 된다. 잘 살고 있나.. 이런 호의를 받아도 되나.. 반성, 반성..



 진정한 위로는 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을 통해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정말 힘들었겠구나, 아팠겠구나.. 상대방이 나를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공감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이해심을 가지긴 위해선 많은 경험과 그로부터 얻은 깨달음이 필요하다. 제대로 동감하지 못한 채 ’ 힘내‘라는 어설픈 위로를 건네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가장 두려운 것은 세상의 풍파에 무뎌져 웬만큼 큰 자극이 아니면 공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 내가 상대방의 아픔을 마음으로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불행한 어른으로 자라진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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