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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호레 May 25. 2022

상상과 걱정 사이

-에 대하여 서술해보시오

상상이란 단어에 대한 결을 생각해보자면, 하얗고 푸르른 그 무언가에 가까웠다.

하늘을 날고, 투명인간이 되고,

아름다운 그 어떤 것.


내가 펼친 상상의 세계는 대부분 걱정의 형상을 띠었다.

만약 내일 출장에서 내가 민원인에게 말실수를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올해 7월에도 발령이 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지?

나에게 있어서 상상이란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대비책 그 정도로 여겨졌다.



세상을 살아가긴 위해선 아름다운 상상보다는 당장 눈앞의 닥친 문제의 해결책이 필요했다. 길지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적어도 이때까지 쌓인 데이터로는 그랬다.

'이번 달에 이 정도를 벌면 이 정도는 식비, 월세, 휴대폰비로 써야지'. 밥 벌이는 하고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부터 생긴 오랜 습관이었다.

이런 나에게 이런 상상을 해봤어? 란 질문은, 객관식 20문항 시험을 준비했는데 논술형 1문제 시험지를 받은 기분을 안겨주었다. 행정학과를 나온 나지만, 주관식 1번 '-서술해보시오'는 늘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나무만 바라보느라 숲을 보지 못하는 일에 익숙한 터였다.

빠르게 필요한 학점을 받고, 자격증을 따고, 경력 하나 쌓는 게 내 가치로 여겨졌던 지난날을 보내서 일까. 가려진 하늘을 보기 위해 앞의 나무를 쳐내기 바빴다. 하지만 나의 나무들은 지나치게 쳐내면 쳐낼수록 자라나는 요술을 부리곤 했다.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인 나는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와는 어느샌가 멀어져 있었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그녀가 나타났다. '만약에'라는 운을 띄우는 것을 즐겨하던 그녀는, 모난 곳 없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내가 사과에 대해서 빨갛네? 맛있겠다 이 정도 생각을 했다면, 그녀는 사과에 있는 비타민c, 사과가 나온 백설공주 이야기, 아이폰과 더불어 스티브 잡스까지 떠올리곤 했다.



" 언니, 만약에 길을 걷고 있는데 김우빈이 와서 말을 거는 거야. 그럼 어떡해? 뭐라고 말할 거야?"

"김우빈이 왜 우리 한테 말을 걸어? 그럴 수가 있어?"



이런 식의 대화가 흘러갔다. 처음엔 이 대화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어린 나이 답지 않게 이 말을 해도 무슨 변화가 있을까?, 이 말을 굳이 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입을 닫아버렸던 나였다. 그런 무미건조한 세상 사는 나에 비해 그녀만의 세상에는 신기하고 재밌고 신나는 일들이 많아 보였다. 그녀를 통해 의미 없는 것들이 생기를 찾았다. 그런 그녀가 신기하면서 부러웠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나의 세상보다 넓은 세상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녀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은 나에 대한 반성이었다. 주관이라기엔 어설프고 젊은 꼰대라기엔 개방되어 있지만, 내 사고 안에서만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 무서워졌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반드시 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답이 아니었다. 만약 덧셈에 대한 정의가 변한다면? 하늘에서 갑자기 1이 떨어진다면? 반드시 1+1 이 2가 되지 않는 세상이 올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만 하는 것들에 귀 기울여 왔던 지난날이었다. 그러자 점점 나라는 사람의 색깔은 희미해지고 그저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런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 보기에 없었는데.. 어릴 적 그린 30대의 나는 쿨하고 넓은 시각과 아량을 가진 사람이어야 했다. 어쩌면 이 또한 세상이 정해놓은 좋은 사람이란 기준 안에 나를 가두는 거일 지도. 작은 우물 안에 갇혀 헤어 치면서 옆의 개구리보다 잘난 것에 만족하는 또 다른 개구리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세상을 가지고 싶다. 온전한 나의 세상. 이제 우물을 나올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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