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몸무림
습관처럼 나에게 외치던 말이었다. 고등학교 때 더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은 것도, 취준 때 경북이 7명 뽑는 단 이유로 덜컥 전남을 지원한 것도, 심지어 월마다 올라오는 턱뾰루지도 내 탓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는 말했다. 내 탓이오라고 말하는 일을 지금 당장 중단하라고. 허나 이 것은 나에게 가장 쉬운 도피처가 되곤 했다. 속 시끄럽게 누구를 탓하고 상황을 분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보다 훨씬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물론, 쉬운 길에는 그 대가가 따라온다. 나는 쉽게 낙심했고 헤어 나오질 못했다. 이 기분이 정점을 찍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바로 오늘처럼. 오랜만에 느껴본 기분이었다. 애석하게도 10대의 나, 20대의 나, 이제 갓 서른이 된 따끈따끈한 나는 꾸준히 한결같았다. 간절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무엇인가를 위해 노력해왔단 걸 뜻하는 걸까. 안정적인 직장 타이틀 뒤로 숨어버리는 가장 불안정적인 일을 하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배달앱을 켰다. 아, 배달료 4,000원? 배달료가 이렇게 비싸다니 괘씸하다. 평소 같았음 배달료가 조금 더 싼 메뉴로 변경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은 안된다. 이 때문에 다른 메뉴를 고른다면 내 상황이 더 슬프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띵-동. 배달 도착했다는 반가운 소리.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냈다. 며칠 전에 6캔 산 것 같은데 왜 한 캔만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포장지를 모두 까고 리뷰 이벤트로 받은 계란찜이 있어 리뷰 촬영도 완료. 드디어 먹기 시작한다. 야채곱창에 납작 당면 추가가 필수지.. 혼자 만족하며 쌈까지 야무지게 싸 먹었다. 기분이 나아졌다. 참 단순하다. 동생이 면접시험 때문에 광주에 와있어서 더 빨리 회복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면접 준비할 때 참 괴로웠는데.. 무튼 동생이 광주에 와있어서 참 다행이다. 이래서 다들 연고지, 연고지하는 걸까. 이 놈이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지난 상담이 떠오른다. 지나치게 넓은 진료실에 퇴근을 기다리는 의사가 앉아있었다. 5시 30분에 온 초진 환자는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텁텁한 대화가 흘러갔다. 모니터 뒤로 들리는 타자 소리. 나는 그가 왜 파란색 파리바게트 셔츠를 입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겸직을 하시는 건가. 의사는 겸직이 가능한가? 아니면 타인의 유니폼을 얻어 입을 만큼 엄청난 짠돌이이신 걸까. 그런 생각들만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가 해주는 말을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상담 후 생각나는 건 a4 용지에 휘갈겼던 네모와 사람 형태. 네모가 환경이고 사람이 나라고 그려준 것 같았는데.. 정리를 위한 정해진 마무리 단계인가? 싶었다. 아, 그리고 강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 것. 그건 또렷이 기억난다. 그 말을 듣고 난 다짐했다. 아픈 사람에게 조금 강해질 필요가 있어요 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기로. 상담은 5시 58분에 끝났다. 그의 퇴근은 소중했다.
나의 희망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피어났다. 작은 목표가 하나 생겼고, 연간 계획을 세우고, 행복 회로를 돌리다 보니 에너지가 솟아났다. 본격적으로 마음속 깊은 땅굴을 파고 내 몸 누울 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내린 햇살 한줄기. 아이러니하게도 최악의 순간에서 나는 희망을 만났다. 숨길 수 없는 청개구리 기질+극강의 J. 목표를 잃어 방황을 했던 걸까. 아무튼 이번에도 한고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