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7~8년 전쯤 일인데, 2월에 한 달간 프랑스 여행을 했다. 프랑스 남부 도시인 마르세유에서 시작해 파리에서 마무리하는 일정이었다. 2월은 관광시즌이 아니어서 파리를 제외하고는 한적했던 것 같다. 나는 길치에 여행 계획도 세세하게 세우는 편은 아니어서, 미리 호텔만 예약해 두고 한 도시에 오래 머물며 (호텔 찾는 게 스트레스), 여행 책을 한 권 들고 가 아침에 어딜 둘러볼지 고민하는 식으로 여행을 다녔다.
카르카손은 두 번째나 세 번째로 방문했던 도시였던 것 같다. 여행책자를 보다 중세 성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곳 호텔을 예약했었던 기억.
짐을 들고 기차역에 내렸는데, 역은 한산했다. 역에서 도시 안내 책자랄까 그런 것을 한 부 챙겼다. 내가 예약한 호텔 쪽으로 가려면 역 앞에서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캐리어를 가지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날도 춥고 버스는 오지 않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냐면 꽤 오래 기다렸는데, 버스가 한 대도 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음... 역으로 다시 짐을 끌고 들어갔다. 역무원에게 버스에 대해 물었더니 동절기라 버스는 3시까지만 운행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음.. 그땐 아마 4-5시쯤 되었던 것 같은데, 이제 택시를 타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역을 나섰다.
택시 승차장처럼 보이는 곳이 있긴 했지만, 조금 전처럼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때 지나가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대충 "저기서 택시를 타면 되나요?" 뭐 이런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그 할아버지는 불어로 내게 대답하셨다. 나는 불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냥 느낌적으로, "너 어디 가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택시든 버스든 가는 방법을 알려주시려나 보다 하고 호텔 지도와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보여드렸다. 그 할아버지는 지도를 뚫어지게 보시더니, 내게 뭐라 뭐라고 불어로 얘기했다. 알턱이 있나... 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택시 승차장 쪽으로 가려던 순간, 할아버지가 내 짐을 들더니 손짓으로 따라오라고 했다.
'아... 택시 승차장이 저기가 아니었구나...'하고 그 할아버지를 따라가는데, 멀지 않은 역 근처에 또 다른 할아버지가 운전석에 앉아 계셨고, 그 할아버지가 차에서 내려 두 분은 내 지도를 함께 보며 연구를 하는 느낌. '아 그럴 필요 까진 없는데...' 내겐 구글맵이 있으니... 실은 걸어서라도 가려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걸어서 30분). 두 분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불어를 전혀 모르는데도, 몇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이 호텔이 어딘지 알아?라고 두 분이 지도를 보고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 지금 가는 버스가 없을 텐데... 하는 걱정... 그러더니 어떻게 하지? 하는 고민까지. 그러더니 두 분이 내게 불어로 또 한참 뭔가 설명하신다. 죄송해요. 전 불어를 못합니다.
그러자 내 캐리어를 들고 온 그 할아버지는 차 트렁크에 냅다 내 짐을 싣고 내게 뒷좌석 문을 열어주셨다. 본인은 내 지도를 들고 조수석에 탑승. 순간 '난 이렇게 프랑스 새우잡이 배에 타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상황은 뭔가 거절할 수 없는 그런 게 있었달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인데, 나는 뭔가 걱정을 하면서도 그 차 뒷자리에 타게 되었다. 두 할아버지는 지도를 계속 체크하며 연신 불어로 이야기를 하셨다. 적어도 지도를 저렇게 계속 확인하시는 걸 보면 내가 잡혀가는 건 아닐 테지... 하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어떤 다리 밑에 왔을 때, 차가 갑자기 섰다. 어? 여기는..... 호텔 건물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곳인데???
그 두 분은 몸을 돌려 나를 보며 정말 침이 튀길 듯 열정적으로 뭐라고 말씀하셨다. 아? 뭐지? 뭔가 지금 도망가야 하는 상황인 걸까? 그런데 그때 내 귀에 자꾸 들려오는 단어. "roman". 그리고 그 할아버지들의 열정적인 손짓을 쫓아 고개를 돌려보니 어떤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그 다리를 가리키는 손짓을 하자 두 할아버지는 너무 기뻐하며 바로 그거라는 듯 불어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마음이 놓여서였을까? 그다음부터는 불어였지만 또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다. 로마시대 때 지어진 진짜 오래된 다리라는 것. 내가 고맙다고 하고 엄지 척을 해드리자 다시 출발!
그리고 나를 무사히 호텔 앞에 내려주셨다. 짐을 호텔까지 들어주시며. 내가 연신 고맙다고 하고 프랑스에 와서 익힌 "Merci!"를 외치자 함박웃음으로 인사를 한 뒤 떠나셨다. 카르카손은 중세의 성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근사한 성 구경도 하고 신기한 박물관도 가고 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나를 호텔에 데려다준 두 할아버지가 침 튀기며 내게 도시의 자랑인 다리를 보여주려고 했던 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