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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몬 Jan 13. 2024

아직 안 갔니?

이것도 벌써 꽤 지난 이야기다. 내 생일 즈음이었으니, 2월이었겠지? 남동생이 종로에 맛있는 국숫집이 있다며 나와 여동생을 호출했다. 당시 남동생은 원래 계획했던 진로에 생각지 못한 차질이 생겨 고민을 많이 하다 새로운 진로를 위해 공부를 시작한 참이었다. 공부를 시작한 지 이주 남짓 되었을까? 원래 했던 공부가 아니어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며 나와 여동생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날 국수를 사주려고 우리를 모두 불러 모은 것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어리광을 부리려고 그런 것인지, 뭐 여하간 국수는 맛있었고, 커피를 마시러 갔다.


남동생은 아무래도 이 공부는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며, 학원비를 환불받아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는 시작한 지 2주밖에 안되었으니 1달은 채워보자고 달래고 응원해 줬던 것 같다. 그러자 갑자기 사주를 봐야겠다며 근처에 보이는 사주카페에 우리를 끌고 갔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에 도인 같은 음성의 사장님이 우리를 맞아주셨다. 


남동생이 생년월일과 생시를 말하자, 그 사장님은 거침없이 한문으로 사주를 풀기 시작하셨고, 고민이 무엇인지 물어보셨다. 남동생은 최근 공부를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이 길은 본인의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장님은 "자네는 공부를 해야 풀리는 사주야."라고 방어를 하기 시작하셨는데, 그 단호한 말투에 웃음이 나서 지켜보는 나와 여동생은 옆에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남동생도 질 순 없었다. "전 머리가 나쁜 것 같아요." 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이유를 계속해서 읊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장님은 "음 머리가 좋은 애들은 공부를 할 필요가 없지?" 라며 한마디도 지지 않고 철벽 방어를 하시는 게 아닌가? 급기야 "자네가 그동안 뭔가 불만족스러웠던 건, 다 공부의 길을 가지 않아서야. 자네 길은 공부밖에 없어."라고까지 하셨다. 


내가 여동생과 옆에서 흐느끼듯 웃었던 기억이 나는데, 아마도 남동생은 본인이 공부를 그만둬야 하는 이유를 끝도 없이 만들어내고, 사장님이 거기에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칼같이 대꾸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공부는 내길 아님 vs 공부만이 너의 길로 설전을 벌인 뒤, 사장님은 다른 테이블에 사주를 봐주시러 가셨다. 남동생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게 말이 되냐고 해, 나와 여동생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렇게 잠시 거기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사장님은 우리 테이블 옆을 지나가시며 "아직 공부하러 안 갔니?"라고 끝까지 남동생에게 힘을 주어 이야기하셨다.


그날 그 사주카페에서 나와 그다음엔 뭘 했을까? 남동생은 정말 공부하러 학원 자습실에 갔다. 푸하하. 여동생과 내가 그 학원에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고 미친 듯이 웃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준비하던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어떻게 어떻게 그 전공 대학원에 진학하더니, 지금은 연구원이 되었다. 우리는 가끔 그 사주카페 이야기를 한다. "그 아저씨 정말 용하다. 어떻게 아셨을까?" 엄마는 이 이야기를 듣더니, "공부하고 있다는 애를 그럼 공부하지 말라고 하니, 그냥 공부 열심히 하라고 그러지. 좋은 분이네."라시더니 다음에 한 번 가보자고. 남동생도 진로를 바꿔 새로운 공부를 하는 시점에 마음이 불안했을 텐데, 그 사장님 덕분에 조금은 불안이 달래 지지 않았을지. 여하튼 용한 분이고, 고마운 분이다. 


(이미지 출처: 챗GPT를 이용해 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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