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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몬 Jul 15. 2023

평가하기

내가 누굴 평가한다는 거야?

통역사를 뽑는 자리에 심사위원으로 불려 간 적이 있다. 가기로 약속은 한 상태에서도 다른 사람을 평가해 본 적이 없어 걱정이 되었다. 그때까지 해본 평가라면 기업체의 영어시험 답안지 정도인데, 영어 글쓰기의 실력차가 크게 나는 경우가 많았고 별 고민 없이 채점을 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음 이 사람은 내가 돈 주고 일을 맡길만 해'라면 일단 90점대, '음 이 사람은 좀 오류는 있지만 문장이 크게 깨지진 않네'라면 80점대, '음 심각한 오류가 많군'이라면 70점대, '영어 글쓰기를 할 수 없군' 또는 '완성하지 못했군'이라면 60점대를 주었던 기억이다. 하지만 이번엔 통역사들을 평가해야 하니 실력들이 그렇게 차이 나지 않을 확률이 컸다. 


통역 시험 문제를 현장에서 받았다. 평가표와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시험 문제를 보니, 통역사가 출제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고 난이도는 적절했다. 내가 시험을 보는 입장이라면,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문제였다. 그리고 시험을 준비했는지 평가할 수 있는 요소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었다. 


총 평가위원은 네 명이었다. 나처럼 외부에서 섭외된 통역사 한 명, 회사 내의 사내 통역사 한 명, 그리고 새로 뽑히는 통역사가 함께 일하게 될 부서의 중간급 관리자, 그리고 나였다. 먼저 번역시험을 치르고 통역시험을 본 뒤 면접이 있는 듯했고 면접 위원은 다른 방에서 준비하고 있었다. 


시험이 시작되었다. 시험을 보는 사람이 얼마나 떨릴까 하는 생각에 나도 떨렸다. 내가 면접 보던 순간도 떠오르고, 앞으로도 이직을 한다면 다시 면접을 볼 텐데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통역에 대해 주관식으로 코멘트를 하는 건 사실 늘 대학원에서 스터디를 하며 하던 일이었지만, 점수로 평가해 보기는 처음이라 떨렸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중요한 순간일 수 있으니, 나도 잘 들어줘야 한다.


시험은 참가자 중 두 사람의 경합이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충분히 합격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다만 스타일이 아주 달랐다. A 통역사는 퍼포먼스가 뛰어났다. 즉, 본인이 놓친 부분,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통역만 듣는다면 티가나지 않았다. 자신감 넘치고 매끄러운 통역을 보여줬다. 다만, 그러다 보니 정확성이 떨어진 부분이 있었다. 정확히 듣지 못한 부분을 추론해서 연결시킬 순 있지만, 없는 말을 보태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 B 통역사는 퍼포먼스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조금 아마추어 같은 태도를 보였는데, 놓친 부분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잘 잡은 곳의 통역을 들어보면 맥락을 더 잘 이해했고 정확성이 더 높았다.


이제 평가의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B 통역사에게 더 높은 점수를 줬다. 통역 스킬은 A에 비해 부족했지만, 영어 실력 자체는 더 좋았다. 그리고 본인이 정확히 이해한 부분을 전달할 때, 조리있게 핵심을 잘 전달했다. 그리고 내가 조금 B 같은 면이 있다는 점도 평가에 작용했을지 모르겠다. 나도 놓치게 되면 입을 닫고 아무 말도 못 해 항상 지적을 받았다. 처음 본 사람이지만 동병상련이 조금 느껴졌달까? 


나중에 내가 점수를 더 높게 주었던 B가 합격했단 소식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B를 더 높게 평가한 모양이었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내가 혹시 어떤 면접을 보게 되면 이렇게 해야겠다, 이런 건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 글씨는 또박또박 쓴다. 

(번역 시험지에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 힘든 흘려 쓴 글씨는 머리가 아파왔다)


2. 성의 있게 준비한다. 

(회사 이름, 부서, 최근 기사에 가장 많이 나온 사업 등의 이름을 준비해 온 참가자와 그렇지 않은 참가자는 바로 구분이 됐다. )


3. 평가는 매우 주관적이니, 떨어져도 너무 속상해하지 않는다.

(겨우... 나정도의, 그러니까 그렇게 경력이 많지 않은, 막 몇십 년 통역을 한 베테랑의 평가가 아닌 경우도 있을 테고, 이번에 내가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 좀 더 점수를 줬듯이 다른 평가자도 그럴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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