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당탕탕

by 레모몬

어제였다. 아침 8시로 유연근무를 설정해 놨다고 생각하고 부랴부랴 출근했다. 출근해 보니 나는 9시까지 출근해도 되는 날이었다. 그제 원래 근처 사는 친구 집에 모여 와인을 마시기로 하고 한 병 사두었었는데, 누구는 비염, 누구는 알레르기, 누구는 감기로 약을 먹느라 술은 마시지 않았다. 친구 집에서 회사까지는 운전해서 30분인데, 아침에 집에 빨리 들러서 출근 준비를 하고 오려고 했던 것 같다. 과거의 내가 말이다. 하지만 대개 1시간씩 일찍 유연근무를 하는 나는 친구네 집에서 자지 않고 집에 오게 되자 그냥 싹 잊고 아침 일찍 출근을 해버렸다.


그리고 오늘은 아침에 일정이 바빴다. 먼저 설에 떠날 가족여행을 갈 예정이라 짐을 아침에 싸고, 미루었던 미용실 예약이 10:30이었으며, 그 후 이비인후과에 갔다가, 본가에 갈 예정이었다. 부모님 집에 가는 버스는 13:19분 차였다.


미용실에는 30분 전쯤 출발하면 되겠지... 하며 미적거리다 나갈 시간이 코앞에 닥쳤다. 재빨리 짐을 쌌다. 어차피 사진엔 패딩만 나올 텐데 딱 두 벌만 챙겨가기로 했다. 그런데 나오려고 하니 왜 이렇게 빠진 게 많은 건지. 일주일쯤 집을 비울테니 쓰레기도 버려야지, 부모님 선물로 산 화장품도 들고 가야지, 남동생이 먹고 싶다고 한 과자도 챙겨야지, 숨이 가빴다.


빠듯하게 미용실로 출발했다. 상가 주차장에 주차 자리가 딱 하나 남아있었다. 러키! 를 외치고 미용실로 뛰어갔다. "일찍 오셨네요?" 하며 미용사 선생님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다. 아... 뭔가 잘못됐다. "저 10시 30분 아닌가요?" 했더니, 컴퓨터를 확인해 본 미용사 선생님은 "11시 30분이신데..."라고 곤란해한다. 10시 30분과 11시 모두 예약이 있는 게 분명했다. "네! 그럼 1시간 있다 올게요!"하고 나는 나는 이비인후과로 향했다.


집 - 미용실 - 이비인후과 - 버스 터미널이 가장 최적의 동선이었다. 하지만 어쩌나. 제대로 못 챙긴 나를 반성하며 몸이 고생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재빨리 이비인후과에 가서 진료를 본 뒤, 약을 받았다. 1월 초 독감에 확진된 이후, 아직 기침을 하고 있는데, 미세먼지 때문인지 비염이 심해졌다고 했다. 바쁘네... 하며 다시 미용실로 향했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고 나자 내가 이제 서울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미용사 선생님은 내 머리를 고데기로 예쁘게 말아주기 시작하셨다. 선생님의 잽싼 손놀림을 멍하니 지켜보다 보니, 아뿔싸!!! 1시 19분 버스를 타야 하는데, 벌써 12시 45분이었다. 선생님, 저 이만 가볼게요,를 외치고 다시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차를 몰아 회사에 왔다. 터미널이 바로 근처에 있기 때문에 회사 주차장에 차를 두고 버스를 타러 갈 생각이었다. 아... 그런데... 지금은 일과시간이다. 주차장은 차들로 가득했다. 주차장을 몇 바퀴 돌다 깊숙한 곳에서 겨우 빈자리를 발견하고 주차를 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0분, 또 뛰어야 했다.


양손에 짐을 가득 들고 1분 전 터미널에 도착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데 버스가 오질 않았다. 조금 늦는 걸까 하고 버스 위치를 조회해 볼 요량으로 고속버스 앱을 켜보았다. 아... 나는 13:39분 버스를 예매했구나... 갑자기 20분이 여유가 생겼다.


20분을 멍하니 앉아 있는데, 아침부터 하도 바쁘게 다녔더니 쉴 수 있어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눈앞에 공항버스가 도착했다. 사람들이 짐을 싣고 버스에 올라타는 걸 보면서 '이번 설에 여행들 많이 가시나 보네'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왼쪽에서 뭔가가 내 뒤통수를 쭈뼛하게 만든다.


내가 예약했던 프리미엄 버스인 금색 버스가 그 공항버스 뒤에 이미 도착했었고 탑승이 막 끝나 출발하려던 차였던 거다. "기사님!!!!!!"을 목청껏 외치고 나는 또 양손에 짐을 가득 들고뛰었다. 버스 한 대 길이를 뛰는 것인데 그 금색버스가 떠날까 봐 최대한 속력을 냈다. 짐을 든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그렇게 서울행 버스를 탔다. 내 자리에 앉아 좌석을 있는 대로 뒤로 젖히고 커튼을 쳤다. '이제 더는 무슨 일 없겠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