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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몬 Jul 22. 2023

스페인어 천재

아스따 마냐냐, 무슨 말이에요?

나는 스페인어는 전혀 할 줄 모른다. 그저 올라! 부에노스 디아스! 그라시아스! 같은 주워들은 단어 몇 개 아는 수준이다. 고등학생 때 배웠던 제2외국어는 중국어여서 불어나 스페인어 독어 같은 유럽언어들은 접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몇 년 전 프랑스 여행을 앞두고 숫자나 배워보자 싶어서 불어를 아주 조금 배워 본 것이 전부이고, 좀 재밌기도 해서 지금 듀오링고(언어 학습 앱)로 조금 연습하는 수준. 아무튼 난 라틴어 계열 언어 지식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올봄이었던 것 같다. 스페인어권 사람과의 회의가 잡혔다. 우리 측은 한서통역사와 함께 회의에 참석했다. 나는 한영 통번역사지만 당시 상대측과 협상해야 하는 계약서는 영문이었기 때문에 참석해서 그 수정을 맡았다. 


상대측은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고 그는 나를 꽤나 반가워했다. 나도 여러 번 보다 보니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도 들어서 반기며 인사했다. 문제는 회의 중간에 발생했다. 그가 "cinco(씽코, 숫자 5)"라고 말했는데, 나의 아주 짧은 불어 실력(실력이라고 말할 수 없음. 숫자 1부터 10, 그리고 인사말?)으로도 그 숫자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왜냐면 불어에서 5는 "cinq(쌍크)"니까. 


그래서 한서통역사님이 통역을 해주기 전 슬며시 5번으로 화면을 이동했다. 그러자 우리의 협상 파트너는 내가 스페인어를 조금은 알아듣는다고 오해한 듯하다. 그 뒤로 자꾸 내게 스페인어로 말을 걸기 시작한다. 참 재밌는 건, 스페인어를 전혀 못하지만 나는 협상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고, 상대방이 말할 때의 표정이나 분위기가 큰 힌트가 되는 데다, 핵심어들이 영어와 발음이 비슷한 덕분에, 알아듣는다기 보다는 눈치를 챌 수 있는 부분들이 있었다. 내가 그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 듯하자 그는 내가 스페인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 정말 믿어버린 듯했다.


첫째 날 예정된 회의 시간이 끝나고, 그가 회의장을 나서며 내게 "아스따 마냐냐"라고 말했다. 나도 그를 따라 "아스따 마냐냐"라고 했다. 옆에 앉았던 동료가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음... 내일 보자는 거 아닐까요? 저도 몰라요. 그냥 따라 했어요." 나는 대답했다. 아직 회의실에 같이 계시던 한서통역사님이 "Hasta manana! 내일 보자는 뜻 맞습니다!"하고 방을 총총 나가신다. 


다음날 회의를 시작하는데, 어제 그가 답하기로 약속했던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몇 가지 단어들이 들려왔다. "꼴레가" colleague 동료겠지? "노체" 어쩐지 night 밤을 말하는 것 같았다. "컨설뚜" consultation 협의? '어젯밤 동료들과 협의를 해보았다?'는 의미인가? 하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더니 이제 우리 협상파트너는 내가 스페인어 능력자라도 되는 양 나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한다. 


회의가 잘 마무리되었고, 이제 작별 인사를 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내게 다가오더니 속사포처럼 스페인어를 쏟아낸다. 물론 내가 알아들을 턱이 있나. 긴 이야기를 하다 "아스따 루에고"라는 소리가 들렸다. 왠지 다음에 또 보자 그런 느낌. 나도 "아스따 루에고"했다. 그는 또 무엇이라고 말했는데, "에스빠뇰" 이런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나에게 스페인어 칭찬을 한마디 건넨 느낌? 우리도 외국인이 한국말 한두 마디 하면 칭찬하듯 그런 것처럼. 그래서 "그라시아스!"로 이 혼돈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이틀간의 스페인어 천재 체험은 그것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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