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주의자 vs 파이터

쌈닭 환영

by 레모몬

어떤 자리든, 관리자가 되면 본인 일만 챙기고 본인 밥그릇만 챙기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끄는 팀 전체의 밥그릇도 챙겨야 한다. 다른 팀과 업무 조율을 할 때 성과가 날 수 있는 일은 당겨오기도 하고 팀에 과부하가 걸릴 듯하면 적절히 일을 쳐내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나 같은 직원이 일을 편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팀은 그런 내부에서의 싸움뿐 아니라 업무 자체가 협상인 곳이다. 협상은 초반엔 서로 좋은 분위기에서 진행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쟁점만 남기 때문에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일도 자주 있고 양측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버티게 되면 상당히 힘들어진다. 그러니 우리 팀의 팀장은 안팎으로 조율하고 싸워야 하는 역할이 주어지는 셈이다.


이런 역할을 능수능란하게 잘하는 분들, 즉 소통능력이 뛰어나서 챙길 것도 잘 챙기고, 줄 땐 생색도 잘 내고, 파이터 기질도 있어서 그 와중에 정말 중요한 건 싸워서라도 얻어내고야 마는 그런 팀장님이랑 일할 땐 일이 수월하다. 아니, 수월한 정도가 아니라 신나게 일하게 된다. 열심히 준비하면 그 보람을 느낄 수 있다. 나가서 이기고 오니까.


그런데 모두가 파이터 기질이 있는 건 아니니까, 평화주의가가 우리 팀에 오면 팀장님도 우리도 모두 힘들어진다. 협상은 아무리 좋게 시작해도, 그 끝은 꽤 치열한 갈등상황이 요구된다. 사실 너무 쉽게 술술 풀리는 협상이 있다면, 그건 사실 우리가 지는 협상을 하고 있을 확률이 있다. 모든 걸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할 순 없지만, 우리가 반드시 얻어내야 하는 것은 챙기고, 상대에게도 이 협상의 의미가 있을 수 있도록 원하는 걸 파악해 적절히 들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런 갈등 상황은 피해 갈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


내가 잘난척하며 우리 팀의 리더는 파이터가 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나도 평화주의자 유형에 가깝다. 나도 협상에 참여하면서 갈등이 높아지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도무지 이 상황은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사고가 정지되고, 그 상황에서 탈출하고만 싶어 진다. 그나마 나는 내가 발언을 하더라도 통역사로서 "비둘기" 역할만 하기 때문에 내가 그 상황을 풀어나가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라 그래도 견딜 수 있는 것. 나는 내가 그 협상을 이끌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우리 팀에 나같이 갈등 상황을 못 견뎌하는 팀장님이 계셨던 적이 있다.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인데, 그걸 하기 어려워하는 분이었다. 갈등 상황이 연출되면, 그 팀장님은 어쩔 줄 몰라하셨다. 그 모습이 한심해서가 아니라, 어떤 마음인지 너무 이해가 돼서, 지켜보기 힘들었던 기억이다. 그런 쌈닭 기질이라는 것이, 물론 훈련하면 어느 정도는 갖출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많은 부분 타고나는 성격에 달린 문제 아닌가? 평화주의자가 하루아침에 파이터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노력한다고 해도 타고난 파이터처럼 싸움꾼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올해 우리 팀의 팀장님은 숨겨둔 파이터 본능을 이따금씩 꺼내서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분이다. 덕분에 일상은 평화롭고, 싸움에서도 지지 않는다. 올해 팀장님 만족도는 최상!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우리 팀의 팀장님에겐 실은 영어실력보다 지는 건 못 참는 싸움실력이 필요하다는 걸 인사를 담당하는 분들이 꼭 알아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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