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비결을 알려줄까 해.

나의 기준, 너의 기준

by 레모몬

도쿄 출장에서 돌아오던 길이다. 그날 오후까지 회의를 하고 공항에 부랴부랴 도착해 늦은 시간 비행기에 탑승을 하고 보니 피로가 몰려왔다. 하네다-김포 편이었는데, 비행기에서 내리면 이미 한밤중, 한 시간쯤 걸려 집에 가면 자정이 넘을 시간이었다. 거기다 여름에 일본을 방문한 건 처음이었는데, 우리나라보다 더한 습도에 시달려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나는 비행기 가운뎃 줄의 왼쪽 통로 좌석에 앉았고, 한 칸(가운데 자리)을 띄고 오른쪽 통로 자리엔 출장에 동행했던 동료가 앉았다.


당시 나도 그도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다. 나는 경력직 통역사로 입사한 것이었고, 그 친구는 공채 신입사원이었다. 나보다 훨씬 어렸는데, 센스가 만점이어서 비행기의 좌석도 적절히 떨어트려 예매를 해준 것. 그 친구도 출장길에 지치긴 매한가지였다.


문제의 시작은 그 친구와 나 사이, 즉 그 가운데 자리에 탑승한 한 할아버지가 대화를 시도하면서였다. 나는 조금, 아니 많이 귀찮았다. 나는 사실은 내성적이지만 그런 스몰토크는 오히려 즐기는 편인데, 그날은 너무 피곤해서 그 할아버지가 말을 붙이시는데 적당히 대답하고 대화를 종결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은 그 신입사원은 '쟤가 저런 모습이 있단 말이야???'싶게 놀랍도록 정중한 태도로 예의 바르게 할아버지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애써 대화가 끝나는 듯싶어 안심하는 찰나 그 친구가 너무 성심성의껏 대답을 하는 바람에 대화의 불씨가 꺼질 듯 꺼질 듯 살아났다. 할아버지는 지루한 비행에 말동무가 생기자 신이 나셨고, 이번에 왜 도쿄를 방문하셨는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는지, 어딜 가셨는지, 누굴 만났는지를 사진과 함께 말씀하셨다. 내가 이걸 언제까지 들어야 할까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였다. "자네들이 내 이야기도 너무 잘 들어주고 고마워서, 내가 인생의 비결을 알려줄까 해."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내가 인생의 비결을 알려줄까 해

난 그때 정말 영혼 없이 듣고 있었을 테니 잘 들어줘서 고마운 상대는 내가 아닌 그 친구였을 것이다. 그 친구는 또 "예, 어르신!"하고 싹싹하게, 그리고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난 그즈음에 그 친구에게 눈빛을 보냈던 것 같다. 그만 좀 하라는. 그 친구는 그러나 똘똘한 눈빛으로 그 인생의 비결을 기대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인생을 살 땐 내 기준대로 살아야 돼. 남의 기준이 아니라. 그 기준은 나 자신을 잘 돌아보고 정해야 하지. 그 기준을 정하고 나면, 판단할 때 그 기준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야. 다른 조건들은 필요가 없지. 예를 들어볼게. 돈을 많이 버는 게 중요한 사람들이 있어. 그런 사람들은 경제적 성공이라는 기준으로 결정을 하면 되는 거야.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직업? 다 필요 없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전혀 생각하지 않은 분야에도 도전할 수 있는 거지. 오히려 기회가 넓어져. 그리고 행복해지고."


기대를 하나도 하지 않고 듣고 있던 난 꽤 공감할 수 있는 얘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덧붙이셨다. "반대도 가능하지. 나는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고, 보람된 일이 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 있어. 자신을 잘 돌아보면. 그런 사람은 돈 많이 주는 일 한다고 행복할까? 남들이 좋다고 하는 일, 그건 남의 기준이야. 내가 좋아하고 즐거운 일을 하면 돼. 그래야 행복해. 그럼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가 찾아올 거야."


난 사실 "남의 잣대, 나만의 기준" 이런 이야기는 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니 속으로 오 이 할아버지 좀 최고인데?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입사원. 나름 그 신입사원도 감동한 얼굴이었다. 그가 말을 꺼냈다. "어르신, 그럼 제 고민 상담 좀 해주실 수 있나요?" 난 정말 그땐 너무 깜짝 놀라서 그 친구를 다시 쳐다봤다. 아니,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준 할아버지라고 해도, 고민 상담이라니? 처음 본 사람인데? 그 할아버지는 반색하며 물론이라고 얘기하셨다.


거기서 드는 나의 또 다른 고민. 이 고민 상담을 낯선 할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나, 즉 직장동료,는 들어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 귀를 막고 있어야 하나? 그렇지만 귀를 막는다고 해도 들릴 옆자리였다. 쟨... 내가 들어도 상관없는 걸까? 당황하고 있는데, 그 친구가 거침없이 고민거리를 이야기했다. 고민은 간단했다. 지금 어쩌다 두 사람과 썸을 타게 되었고, 둘 다 그 친구를 좋다고 하는 상황인데, 마음을 정하지 못하겠다는 것.


할아버지는 매우 재밌어하며 그 친구에게 물으셨다. "교제를 할 때, 자네에게 제일 중요한 건 뭐지? 상대가 이해심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지,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지, 예쁜 사람이 좋은 건지, 제일 중요한 걸 생각해 봐. 그리고 다른 조건은 다 생각할 게 없어. 그것만 생각하고 결정하면 돼." 그러나 그 신입사원은 전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는 그 친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런저런 예를 들어 설명하셨는데, 그 친구는 공대를 졸업한 비유와 상징에 약한 사람이었고, 할아버지는 점차 저급한 예를 들기 시작하셨다.


급기야 나중엔 "아니 그러니까 자네가 말이 잘 통하는 또래의 여자친구를 만나는 게 기준이라고 해봐. 자네가 25살이라고 해보자. 그런데 10살 많은 김태희가 와서 자네를 좋다고 해. 사귈 거야?" 그 친구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사귀어야죠. 김태희인데." 할아버지는 "아니... 그러니까... 자네 기준이 원래 미인이면 주저 없이 김태희를 만나도 되지만, 말이 잘 통하는 또래가 기준이잖아. 그럼 아무리 김태희가 사귀자고 해도 거절해야지." "김태희면 사귈 건데요."


할아버지는 몇 번 더 시도하다 답답하셨는지 나를 쳐다보셨다. "자네가 대답해 보게. 자네가 남자친구를 만날 때 말이 잘 통하고 그런 게 기준이라고 해봐. 근데 어디 무식한 건물주 놈팽이가 사귀자고 해. 돈은 진짜 많아. 그럼 만날 거야?" 난 할아버지가 기대하는 답을 해드렸다. "안 만나야죠. 아무리 부자라도." 할아버지는 이제야 속이 시원하다는 듯 "그렇취!!!"를 외치며 "그래, 자기 기준만 맞으면, 다른 조건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야. 말이 정말 잘 통하는 게 중요하면, 얼굴이 좀 못나도 돈이 좀 없어도 다 일단 만나볼 수 있는 거야. 나는 근데 능력 있고 성실한 사람이 기준이야, 그럼 말 좀 안 통하고 답답하고 성격이 못된 구석도 있고 해도 만나는 볼 수 있는 거라고. 근데 본인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하면 안 되는 거라고.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건 고민해볼 가치도 없어. 대신 그 기준만 맞는다면 다른 부분에 대해선 열린마음을 가져봐."


그 할아버지가 일장 연설을 마치셨을 때 이제 비행기는 착륙을 하고 있었다. 그 신입사원은 할아버지에게 조언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는데, 할아버지는 "진짜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구먼"이라며 웃으셨다. 나도 실은 같은 마음. 그 할아버지가 비행기를 내리며 내게 말씀하셨다. "저 친구가 그 둘 중 누굴 만나게 될지 궁금하긴 해." 그 둘 모두와 결국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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