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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몬 Aug 17. 2023

인생의 비결을 알려줄까 해.

나의 기준, 너의 기준

도쿄 출장에서 돌아오던 길이다. 그날 오후까지 회의를 하고 공항에 부랴부랴 도착해 늦은 시간 비행기에 탑승을 하고 보니 피로가 몰려왔다. 하네다-김포 편이었는데, 비행기에서 내리면 이미 한밤중, 한 시간쯤 걸려 집에 가면 자정이 넘을 시간이었다. 거기다 여름에 일본을 방문한 건 처음이었는데, 우리나라보다 더한 습도에 시달려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나는 비행기 가운뎃 줄의 왼쪽 통로 좌석에 앉았고, 한 칸(가운데 자리)을 띄고 오른쪽 통로 자리엔 출장에 동행했던 동료가 앉았다.


당시 나도 그도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다. 나는 경력직 통역사로 입사한 것이었고, 그 친구는 공채 신입사원이었다. 나보다 훨씬 어렸는데, 센스가 만점이어서 비행기의 좌석도 적절히 떨어트려 예매를 해준 것. 그 친구도 출장길에 지치긴 매한가지였다. 


문제의 시작은 그 친구와 나 사이, 즉 그 가운데 자리에 탑승한 한 할아버지가 대화를 시도하면서였다. 나는 조금, 아니 많이 귀찮았다. 나는 사실은 내성적이지만 그런 스몰토크는 오히려 즐기는 편인데, 그날은 너무 피곤해서 그 할아버지가 말을 붙이시는데 적당히 대답하고 대화를 종결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은 그 신입사원은 '쟤가 저런 모습이 있단 말이야???'싶게 놀랍도록 정중한 태도로 예의 바르게 할아버지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애써 대화가 끝나는 듯싶어 안심하는 찰나 그 친구가 너무 성심성의껏 대답을 하는 바람에 대화의 불씨가 꺼질 듯 꺼질 듯 살아났다. 할아버지는 지루한 비행에 말동무가 생기자 신이 나셨고, 이번에 왜 도쿄를 방문하셨는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는지, 어딜 가셨는지, 누굴 만났는지를 사진과 함께 말씀하셨다. 내가 이걸 언제까지 들어야 할까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였다. "자네들이 내 이야기도 너무 잘 들어주고 고마워서, 내가 인생의 비결을 알려줄까 해."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내가 인생의 비결을 알려줄까 해

난 그때 정말 영혼 없이 듣고 있었을 테니 잘 들어줘서 고마운 상대는 내가 아닌 그 친구였을 것이다. 그 친구는 또 "예, 어르신!"하고 싹싹하게, 그리고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난 그즈음에 그 친구에게 눈빛을 보냈던 것 같다. 그만 좀 하라는. 그 친구는 그러나 똘똘한 눈빛으로 그 인생의 비결을 기대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인생을 살 땐 내 기준대로 살아야 돼. 남의 기준이 아니라. 그 기준은 나 자신을 잘 돌아보고 정해야 하지. 그 기준을 정하고 나면, 판단할 때 그 기준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야. 다른 조건들은 필요가 없지. 예를 들어볼게. 돈을 많이 버는 게 중요한 사람들이 있어. 그런 사람들은 경제적 성공이라는 기준으로 결정을 하면 되는 거야.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직업? 다 필요 없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전혀 생각하지 않은 분야에도 도전할 수 있는 거지. 오히려 기회가 넓어져. 그리고 행복해지고."


기대를 하나도 하지 않고 듣고 있던 난 꽤 공감할 수 있는 얘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덧붙이셨다. "반대도 가능하지. 나는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고, 보람된 일이 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 있어. 자신을 잘 돌아보면. 그런 사람은 돈 많이 주는 일 한다고 행복할까? 남들이 좋다고 하는 일, 그건 남의 기준이야. 내가 좋아하고 즐거운 일을 하면 돼. 그래야 행복해. 그럼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가 찾아올 거야." 


난 사실 "남의 잣대, 나만의 기준" 이런 이야기는 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니 속으로 오 이 할아버지 좀 최고인데?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입사원. 나름 그 신입사원도 감동한 얼굴이었다. 그가 말을 꺼냈다. "어르신, 그럼 제 고민 상담 좀 해주실 수 있나요?" 난 정말 그땐 너무 깜짝 놀라서 그 친구를 다시 쳐다봤다. 아니,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준 할아버지라고 해도, 고민 상담이라니? 처음 본 사람인데? 그 할아버지는 반색하며 물론이라고 얘기하셨다.


거기서 드는 나의 또 다른 고민. 이 고민 상담을 낯선 할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나, 즉 직장동료,는 들어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 귀를 막고 있어야 하나? 그렇지만 귀를 막는다고 해도 들릴 옆자리였다. 쟨... 내가 들어도 상관없는 걸까? 당황하고 있는데, 그 친구가 거침없이 고민거리를 이야기했다. 고민은 간단했다. 지금 어쩌다 두 사람과 썸을 타게 되었고, 둘 다 그 친구를 좋다고 하는 상황인데, 마음을 정하지 못하겠다는 것. 


할아버지는 매우 재밌어하며 그 친구에게 물으셨다. "교제를 할 때, 자네에게 제일 중요한 건 뭐지? 상대가 이해심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지,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지, 예쁜 사람이 좋은 건지, 제일 중요한 걸 생각해 봐. 그리고 다른 조건은 다 생각할 게 없어. 그것만 생각하고 결정하면 돼." 그러나 그 신입사원은 전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는 그 친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런저런 예를 들어 설명하셨는데, 그 친구는 공대를 졸업한 비유와 상징에 약한 사람이었고, 할아버지는 점차 저급한 예를 들기 시작하셨다. 


급기야 나중엔 "아니 그러니까 자네가 말이 잘 통하는 또래의 여자친구를 만나는 게 기준이라고 해봐. 자네가 25살이라고 해보자. 그런데 10살 많은 김태희가 와서 자네를 좋다고 해. 사귈 거야?" 그 친구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사귀어야죠. 김태희인데." 할아버지는 "아니... 그러니까... 자네 기준이 원래 미인이면 주저 없이 김태희를 만나도 되지만, 말이 잘 통하는 또래가 기준이잖아. 그럼 아무리 김태희가 사귀자고 해도 거절해야지." "김태희면 사귈 건데요."


할아버지는 몇 번 더 시도하다 답답하셨는지 나를 쳐다보셨다. "자네가 대답해 보게. 자네가 남자친구를 만날 때 말이 잘 통하고 그런 게 기준이라고 해봐. 근데 어디 무식한 건물주 놈팽이가 사귀자고 해. 돈은 진짜 많아. 그럼 만날 거야?" 난 할아버지가 기대하는 답을 해드렸다. "안 만나야죠. 아무리 부자라도." 할아버지는 이제야 속이 시원하다는 듯 "그렇취!!!"를 외치며 "그래, 자기 기준만 맞으면, 다른 조건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야. 말이 정말 잘 통하는 게 중요하면, 얼굴이 좀 못나도 돈이 좀 없어도 다 일단 만나볼 수 있는 거야. 나는 근데 능력 있고 성실한 사람이 기준이야, 그럼 말 좀 안 통하고 답답하고 성격이 못된 구석도 있고 해도 만나는 볼 수 있는 거라고. 근데 본인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하면 안 되는 거라고.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건 고민해볼 가치도 없어. 대신 그 기준만 맞는다면 다른 부분에 대해선 열린마음을 가져봐."


그 할아버지가 일장 연설을 마치셨을 때 이제 비행기는 착륙을 하고 있었다. 그 신입사원은 할아버지에게 조언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는데, 할아버지는 "진짜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구먼"이라며 웃으셨다. 나도 실은 같은 마음. 그 할아버지가 비행기를 내리며 내게 말씀하셨다. "저 친구가 그 둘 중 누굴 만나게 될지 궁금하긴 해." 그 둘 모두와 결국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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