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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Zhu Oct 30. 2019

바뀔 수도 있다는 희망   

바뀌어야 한다는 다짐,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눈물샘을 건드리는 지점이 없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훔치는 수준을 넘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당황스럽게도 나는 좀 과하다 싶게 눈물이 났다.


옆에서 봤으면 지영이 겪는 불합리를 똑같이 경험한 전업주부인 줄 생각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싱글이다.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지 않았고 당연히 그로 인한 경력단절은 없었다. “점을 봤는데 다음이 아들이라더라”라며 친할머니는 엄마에게 셋째를 가지라고 열심히 종용하였다는데 엄마는 듣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남동생은 없고 위로 언니만 있는 둘째다. 친할머니가 종종 “네 동생이 남자였는데……”라며 생긴 적도 없는 남동생을 언급했지만 그뿐이었다. 남자 형제에 치일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영화를 보면서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제가 가장 늦게 알았네요”

정신과를 찾은 지영이 말했다. 그녀는 몰랐다. 자신이 종종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을. 가끔 깜박깜박하고 가슴이 쿵 할 때가 있지만 괜찮은 줄 알았다. 빙의라는 방법으로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자신의 내면이 튕겨져 나오고 있는 것을 그녀는 몰랐다. 이 지점이었다. 대현은 되려 걱정하는데 정작 지영은 괜찮다고 하는 장면은 꽤 여러 번 나왔고, 관객인 나는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괜찮다는 지영이 아팠다. 지영은 육아가 엄마의 몫이라는 것에 한 치 의심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손목이 아픈 것도 당연히 참고 잠깐씩 기억이 끊기는 것도 '애 낳으면 다 그렇다더라'며 대수롭지 않아 했다. 단단히 고착되어 이상한지도 모르는 것은 지영만은 아닐 것이다. 눈물이 났다.


왜 82년생 김지영일까.

‘김지영’은 당시 가장 흔한 여자 이름이어서 주인공의 이름이 되었다고 원작의 조남주 작가는 말했다.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벽들은 대현의 아내, 미숙의 딸, 지석의 누나인 김지영만의 특별한 개인적 사건들이 아니다. 모든 김지영의 이야기인 것이다. 내 친구 S이기도 하고 선배 P이기도 하다. 내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해당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개개의 사건은 우리 모두가 속해 있는 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사건이 아니라 이 사회다. 지영의 엄마 세대는 공부 머리가 있어도 딸이어서 학업 지원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그 세대가 자녀를 두었을 때는 아들, 딸 가리지 않고 공부를 시켰다. 그 딸들은 똑같이 배웠고 함께 대학에 진학하여 동등한 역량을 갖췄다. 그런데 사회에 진출했을 때 대등한 대우를 받을 수 없다. 주인공 82년생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대한민국이다.


원작의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다 기억나지는 않았다. 영화를 보면서 ‘아 맞다, 저런 얘기도 있었지’ 했다. 읽은 지 2년도 더 지난 탓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별 사건이 아니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원작은 좀 특이했다. 소설이라고 하지만 보고서에 가까웠다. 지어진 이야기라기보다 80년 전후 출생한 대한민국 여성의 보편적 삶에 대한 기술이었다. 한 명의 배우를 써서 재현 드라마를 찍은 모양새를 취했지만 여성이라면 누구나 직간접으로 겪었을 상황들, 너무 자주 있는 일이라 ‘일상’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나열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너무 평범하니 줄거리는 흐릿해졌는데 잘 쓴 보고서는 결론이 명확한 법, 나를 포함해 사람들은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도, 영화가 개봉한 지금도 성별에 따른 차별을 다루는 데 있어 공정한가에 대한 왈가왈부가 많은 것 같다. ‘과연 여성이 실제 저렇게까지 차별을 받냐, (군대를 예로 들면서) 오히려 남성이 차별받는다.’ 한번 대 보자는 논란인데 지영이 “나 억울해”라고 한 번 큰 소리를 낸 적도 없다는 것이 더 먼저 생각할 본질이지 않을까.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사회적 통념은 너무도 견고하여 옳고 그름을 따져 보지도 않은 채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그저 따랐다. 단순히 남녀의 대립이라고 하기에 지영에게 성별의 잣대를 들이대는 이들 중에는 남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 고모, 김 팀장, 등 여성도 너무 많다. 그들은 차별받지 않았기 때문에 지영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한 차별이 있던 때를 살아왔으나 구별에 대한 신념은 더 확고한 시대였던 것이다. 이 문장을 보고 ‘그래, 60년대생이면 이해하겠다. 82년생이 무슨 차별을 받냐’라고도 하지 말자. 작품이 하고자 하는 얘기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한 판 붙어 보자’가 아니라 ‘모두가 그냥 그런 줄로 여겼던 것들을 함께 짚어 보고 고쳐 가자’ 일 것이다. 이전 세대 대비 분명히 개선되었으나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소설을 쓰고 논란을 안고도 굳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90년대, 2000년 대생들에게는 또 조금 더 나은 사회이기를 바라기에 문제 제기를 했다고 생각한다. 함께 꺼내 얘기하면 바뀔 수도 있다는 믿음이었을 것이다.



소설이 워낙 여러 가지로 도드라졌기에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걱정도 조금 되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영리하게 비교적 잘 만들었지 싶다. 켜켜이 쌓여 현재를 설명하는 과거의 단편들이 절묘하게 겹치는 플래시백으로 소설보다 더 효과를 낸 영화적 기법에 관한 것뿐 아니라, 달라진 캐릭터와 결말도 그렇다. 영화를 보고 7080 엄마들은 판타지라고도 한다고 들었다. 그런 남편, 나서서 싸워주는 그런 친정 엄마, 하다못해 그렇게 순한 아이는 없단다. 맞는 말일 게다. 그런데 그러한 환경에서도 복직은 지영이 노력한다고 일사천리가 되지 않는다.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강조하는 장치는 아니었을까. (물론 공유에게 감히 무심한 남편 역을 맡길 순 없지 않았을까 생각도 했다.) 결말의 경우는, 소설에서는 희망을 볼 수 없었다. 정신과 상담은 진행되지만 지영이 나아졌다거나 상황이 변했는지는 나오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반면 영화는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말끔한 옷을 입고 머리를 단장한 지영과 아이의 하원을 담당하는 대현을 볼 수 있다. 소설은 다큐였으나 영화는 정말 판타지가 된지도 모른다. 그런데 판타지가 나쁠까? 희망이 있을 때 변화를 위한 용기도 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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