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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Zhu Jul 12. 2020

삑사리를 내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바이올린을 포기한 이유 

예배실로 이동할 시간이었다. 악기와 악보, 개인 소지품까지 챙기느라 모두 분주했다. 나는 오히려 속도를 늦췄다. 거의 제일 끝으로 연습실을 나와 앞선 단원들이 계단을 오르길 기다렸다. 그들이 코너를 돌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화장실로 갔고 거기 삼십 분쯤 숨었을 것이다. 예배가 이미 시작하고도 남을 시간이 될 때까지.


“할 줄도 모르는 애가 왜 여기 와 앉아 있어?” 


삑사리를 내지는 않았다. 같은 곳을 여러 번 지적받고도 고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지휘자는 딱 한 번 듣고 오십여 명 단원들 사이에서 나를 집어냈다. 독주를 하는 자리가 아닌 성가대 오케스트라였고 전공자만 자격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브라토가 유려하지는 않지만 현을 짚고 활을 켤 줄은 아니까 열 명 가까이 되는 바이올린 연주자들 틈에서 잘 따라 하면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전문가의 눈에 나는 모자란 정도가 아니라 자격 미달이었다. 아웃. 울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웃’으로서 사라지되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으므로 시간차를 두어 사람들의 눈을 피한 것뿐이었다.


그날 이야기는 겨우 이게 전부다. 바이올린을 배웠다는 말만 듣고 나에게 오케스트라를 권했던 악장 언니가 내가 혹 교회를 떠날까 염려했다는 말을 나중에 전해 듣기는 했지만 다음 주 나는 어김없이 예배에 갔다. 다만 바이올린은 집에 두고.


이후로 지금까지, 집에 두기만 한다.




바이올린을 처음 든 건 국민학교 3학년 때다. 언니를 따라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는데 미처 바이엘에서 체르니로 넘어가지도 못했건만 어느 날 갑자기 엄마는 학원을 끊었다. 그 길로 내 손을 붙잡고 간 곳은 옆 단지 아파트, 바이올린 선생님 댁이었다. 엄마는 당신의 아이들이 악기 하나쯤 연주할 수 있기를 오래전부터 바랐고 이왕이면 두 딸이 서로 다른 악기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80년대 후반, 피아노 말고는 악기 학원이 흔치 않았는데 바이올린 하시는 분을 어디서 용케 찾은 것이었다. 나의 첫 선생님이었고 나는 선생님의 첫 제자가 되었다.


좋아했다. 우리 집에서 선생님 댁까지 족히 삼사십 분은 걸어야 했지만 악기가 무거운 줄도 모르고 들고 다녔으니 좋아했던 게 틀림없다. 아무렴 공중에서 헛돌던 활이 점차 현과 적확히 닿아 소리를 내고 둔탁하던 소리가 음을 내어 멜로디가 되니 신기하지 않았겠나. 겨우 ‘학교 종이 땡땡땡’ 하고도 대단한 연주를 한 양 스스로 뿌듯했고 그렇게 한 곡 한 곡 배워가는 게 재미있었다. 1년 정도 지나서는 선생님과 나, 선생님의 어린 남매로 구성하여 동네 작은 교회에서 발표회를 하기도 했다. 그땐 정말 즐겁게 바이올린을 했다. 보통의 친구들과 좀 다른 걸 한다며 우쭐하기까지 해서 바이올린을 들고 다녔다고 기억한다.


첫 선생님에게 계속 배웠다면 조금 달랐을까. 2년 조금 넘었는지 3년 가까이 채웠을 쯤이었는지 선생님이 멀리 이사를 가게 되어 더 이상 배울 수 없게 되었다. 국민학교 3학년이면 이미 늦은 시작인 것은 알아서 처음부터 전공할 생각은 아니었기 때문에 반드시 레슨을 이어갈 필요는 없었는데 선생님은 제자를 아끼는 마음으로 다른 분을 소개해 주고 떠나셨다. 문제는 이 새 선생님이셨다. 너무 무서웠다. 손가락을 잘못 짚을 때마다 볼펜으로 손마디를 맞았다. 활을 잘못 쓰면 오른 손목을 세차게 낚아채셔서 화들짝 놀라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 바짝 얼어서 실수가 늘었다. 그렇게 내내 긴장한 채 한 시간 레슨이 끝나면 기운이 없어 악기를 들기도 버거웠다. 한 시간 전에 벌써 악기를 챙겨 신나서 집을 나섰던 아이는 레슨 가는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아마도 도살장 끌려가는 소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유 없는 중에 쪼개서 레슨비를 대는 줄 모르지 않아도 고작 국민학생은 철이 없다.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어 레슨을 빠지기 시작했다. 뻔뻔하게 엄마에게는 다녀왔노라 거짓을 고하기까지. 그땐 정말 바이올린이 죽기만큼 싫었다. 연습도 않고 레슨도 빠지니 실력은 늘 리가 없었다.


거짓말이 오래갈 리가 없어서 곧 들통이 났고 엄마는 당장은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런데 혼이 나는 중에도 레슨은 가기 싫다고 버티는 나를 보고 뭔가 문제가 있구나 알아채셨다. 두 번째 선생님과는 그렇게 헤어졌다. 옳거니, 당분간은 바이올린을 쳐다도 안 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벌이에 바빴던 엄마는 자녀 교육을 두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열혈과는 거리가 멀었으면서 나 바이올린 배울 자리 찾는 데는 참으로 부지런했다. 전혀 공백은 없었다.


이번엔 학원이었다. 90년대가 되니 아파트 상가에 피아노가 아닌 ‘음악학원’ 간판이 한 둘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에도 바이올린 특별활동 프로그램이 생기기도 했으니 이제 바이올린도 레어 아이템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학원에는 원생이 굉장히 많았다. 한 타임에 열 명 조금 모자라게 구성되어 함께 레슨을 받았다. 일대일 레슨과는 차이가 분명히 있었는데 ‘적어도 그때 나에게’ 플러스였던 점은 한 시간 내내 선생님의 시선이 나만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앞서 얼굴이 노랗게 질릴 만큼 주눅 들어 배웠던 경험이 있는지라 긴장을 조금 풀 수 있는 것만으로 살 것 같았다. 여럿이 같이 배운다고 해서 대충 모두 함께 깽깽거리다 레슨이 끝난 것은 아니다. 중간중간 한 명씩 봐주셨고 개개인 수준에 맞춰 개별 연습을 하기도 해서 레슨의 질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방식이 나와 비교적 잘 맞았다. 중학교 졸업을 얼마 안 남겨두고 공부에 집중한다는 이유로 그만두기까지 꾸준히 그곳에서 레슨을 받았다. 다시 바이올린이 좋아졌다고까지는 못해도 싫어하지는 않게 되었다.




처음 시작해서 꼬박 6년이다. 죽기만큼 싫어한 때도 있었다지만 바이올린을 해 온 시간을 따지면 그 시기는 오히려 짧은 시간, 그 나머지 세월을 모두 무시하고 처음 본 지휘자의 한 마디 때문에 그만뒀다고? 생각하니 그 사건은 맞춤의 계기였다. 바이올린을 어려워한 지 이미 오래인데 어려서부터 배워 온 악기를 갑자기 안 할 수는 없었다가 ‘나 상처 받았어’ 핑계를 삼은 것이다.


얼마 전 JTBC [비긴어게인]에서 바이올린 전공자의 사연이 소개됐고 즉석 연주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사연자는 조율을 먼저 했는데 헨리의 놀라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고 ‘조율만으로 헨리를 놀라게 하는 OOO’라는 자막이 나왔다.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레슨을 받았음에도 결국 포기했기에 그것이 클래식이든 대중음악 공연이든 바이올린 소리는 가슴을 찌릿하게 하곤 했다. 그렇지만 그러기도 ‘아웃되던 날’의 상처가 남아 있을 때였고 이제는 무뎌져서 훌륭한 연주 자체로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연자가 조율을 하는 장면에서 마음이 덜컹하고 말았다. 나는 조율을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 시작할 땐 누구나 스스로 할 수 없어 선생님의 도움을 받는다. 각각의 현이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조율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실력이 어느 만큼 쌓여 스스로 연습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내 악기 조율은 직접 할 수 있어야 맞다. 그런데 나는 마지막으로 바이올린을 들었던 그날에도 악장 언니에게 악기를 부탁했었다. 음악 천재 헨리는 아마 재미를 위해 유독 놀라는 척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의 덜컹은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 그 순간 바이올린을 포기한 진짜 이유가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 음악학원을 다니던 시절, 바이올린을 ‘덜’ 싫어하게 된 것은 확실하지만 두 번째 선생님에게 배울 때보다 ‘더’ 어려워하게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여러 명 함께 레슨을 받으면서 내가 다른 이들보다 음감이 떨어진다는 것을 깨달아서다. 다시 말해 지독한 음치라는 얘기다. ‘음치’라는 단어는 보통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놀림용으로 대수롭지 않게 쓰이기 마련이지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음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 음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면 당연히 제대로 연주할 수 없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채송화나 되니 밴드 하는 거다. 사실 그것도 실제 전혀 음치가 아닌 전미도니 하는 게지. 바이올린은 음을 제대로 듣지 못하면 음을 제대로 짚을 수 없다. 조율도 할 수 없고. 초보자들은 손가락을 짚어야 하는 위치에 테이프를 붙여놓고 연습을 한다. 그러니 그땐 잘 몰랐다. 그런데 배울수록 내가 얼마나 음의 차이에 둔한지 깨달았고 그 점은 바이올린을 연주하기에는 치명적이었다.


그날 삑사리를 내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지휘자는 내가 느끼지 못한 미세한 음의 삑사리를 들은 게 아니었을까. 나는 모르는 나의 실수가 두렵다. 바이올린은 지금도 그냥 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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