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Zhu Dec 31. 2020

그녀의 눈빛을 잊을 수 있을까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퀸스 갬빗] 리뷰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퀸스 갬빗 The Queen’s Gambit] 9부를 보는 데 5일이 걸렸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이 문장은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먼저 ‘9’라는 숫자는 오타가 아니다. 작품은 7부작인데 마지막 회가 끝난 후 나는 바로 다시 1부를, 그리고 이어 7부를 또 보고 말았다. 다른 하나는, 작품이 웬만해서는 나의 수면 욕구를 이기지 못한다는 점이다. 2~30분의 짧은 에피소드가 아닌 한 하루에 한 편 이상을 달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니 ‘5일’에는 ‘단’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마땅하고, 말하자면 이 작품은 웬만하지 않다는 말이다.


화장은 번졌고 머리도, 옷도 엉망이다. 서둘러 매무새를 가다듬는 중, 여자 (안야 테일러 조이 Anya Taylor Joy)의 손은 초록색 알약과 미니어처 술병에 가 닿았다. 그녀가 체스 경기장에 들어설 때 연신 플래시가 터지는 걸 보아 꽤 중요한 경기인가 본데 상대를 마주한 그녀의 눈빛은 불안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 눈빛은 교통사고 현장의 어린 베스 (이슬라 존스턴 Isla Johnston)에게로 오버랩된다. 첫 장면은 작품에 대한 거의 모든 단서를 던지지만 물음표도 함께다. 혼자가 된 소녀가 체스 선수로 성장하는 이야기일 줄을 짐작하지만 그 과정이 어떠할지, 급박한 중에도 약과 술을 찾는 이유도, 그리고 결국 그 끝이 너무 궁금해지고 만다. 이후 작품은 친절히 그녀의 인생을 보여준다. 변칙 없이 시간의 순서를 충실히 따르고 (체알못에게는 다 같아 보일 수도 있는) 체스 경기가 반복된다. 그런데 전혀 지루하지 않고 매회 흥미롭다. 탄탄한 대본을 바탕으로 연출, 캐릭터, 연기, 어느 하나 빠짐없이 훌륭해서다.


천장 시뮬레이션, 나올 때마다 압도당했다.


[퀸스 갬빗]의 연출이 빛나는 장면은 여럿이다. 금단 증상에 시달리는 베스가 약을 훔칠 때, 들키지 않으려 조용히 단지를 들고 나올 거라는 예상은 여지없이 깨진다. 그녀는 마구 입에 약을 쑤셔 넣었고 마루 바닥을 초록으로 덮더니 그 위에 쓰러졌다. 그녀가 앞으로 줄곧 초록색 캡슐에 붙잡혀 있을 것을 강렬히 새기는 장면이다. 그녀가 겨루는 체스 경기들도 맛있게 요리되었다. 고등학교 체스 클럽과의 첫 다면기나 베니(토마스 브로디 생스터 Tomas Brodie Sangster) 친구들과 겨루는 스피드 체스에서의 속도감은 빨라서, 실제 경기인 듯 승패가 궁금한 게임에서 한 수, 한 수를 클로즈업할 때는 느려서 긴장을 배가시켰다. 토너먼트 양끝에서 결승을 향해 오르는 베스와 베니를 마치 둘이 경기를 하는 듯 장면을 쪼개 붙여 보여주더니 정작 둘의 경기 결과는 술자리 대화로 처리하는 깔끔함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압권은 역시 천장 시뮬레이션이다. 체스 보드가 없는 소녀는 밤마다 약 기운에 의지하여 보육원 높은 천장에 체스 보드를 그린다. 검고 하얀 격자가 점차 영역을 넓히고 위세가 있는 기물들이 하나 둘 거꾸로 솟는다. 베스의 눈을 따라 기물들이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은 여러 번 봐도 나올 때마다 압도당했다. 소련에서 마지막 보르고프 (마르친 도로친스키 Marcin Dorocinski)와 대결 중 마주한 위기의 순간, 베스의 눈이 천장으로 향할 때 비명을 지른 건 나뿐인가.


‘언젠가 우린 모두 혼자가 돼. 그러니 자신을 돌보는 법을 알아야 해.’ 친엄마 (클로이 피리 Chloe Pirrie)의 말이었다. 언젠가 보르고프는 베스가 고아라는 사실을 언급하며 ‘지는 건 선택지에 없다’라고 한다. 아마 베스는 정말 그런 마음으로 살았을 것이다. 친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스스로 이겨 살아남아야 한다고. 그러나 베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알코올 중독에 돈을 밝히고 철도 좀 없어 보이는 양 엄마 (마리엘 헬러 Marielle Heller)는 매니저이자 좋은 친구였다. 베스에게 처음 체스를 알게 해 준 보육원 관리인 샤이벌 (빌 캠프 Bill Camp)도 있다. 그는 베스의 재능과 리스크를 단번에 알아봤고 그래서 가장 적확한 가르침을 주는 어른이었다. 흥미진진하기만도 모자란 작품을 보면서 눈물을 훔치는 순간이 오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건만, 나는 베스의 기사로 채워진 샤이벌의 벽을 발견했을 때 그녀와 함께 울었다. ‘너한테 내가 필요하니 내가 여기 있는 거야’라는 명대사를 날리는 졸린 (모지스 잉그럼 Moses Ingram)은 또 어떤가. 내가 7부를 끝내고 다시 1부로 간 건 어쩌면 이 언니한테 제대로 반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경쟁자이자 동료였던 체스 친구들도 뺄 수 없다. 그들은 보르고프와의 결승을 앞두고 소련 선수들처럼 베스를 위해 하나의 팀이 된다. 베스가 최고 선수로 성장하는 데는 이들 모두의 조력이 있었던 셈이다. 너무 교훈적이라고? 보르고프의 수는 친구들의 예상을 빗나갔다. 결국 게임을 자기 것으로 가져가는 것은 64칸으로 이뤄진 세상을 완벽히 통제한 ‘베스’다. 덕분에 [퀸스 갬빗]의 결론은 시시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퀸스 갬빗]이 ‘더’ 대단한 건 결국 영광을 주인공에게 완전히 돌림에도 '조연일 뿐’인 그 모든 인물들이 개개의 매력으로 각자 살아있다는 점이 아닐는지.


그녀의 눈빛을 잊을 수 있을까요?


앞서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퀸스 갬빗]의 영(0) 차 키워드는 ‘안야 테일러 조이’ 여야만 할 것 같다. 워낙 잘 차려진 무대여서 빛나기도 했겠지만 그녀가 아닌 베스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본래 체스는 보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숨 막히게 머리로만 싸우니 연기라고 할 게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체스를 전혀 몰라도 그녀의 눈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입술을 비트는지 또는 야물게 다무는지, 표정만으로 경기 흐름을 읽을 수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는 하다 하다 미세 근육까지 연기를 하네 싶었다. 이렇게 탁월한 그녀의 안면 연기를 감독은 진작 알았던지 그녀의 얼굴 클로즈업이 유독 많다. 많은 정도를 넘어 사실 [퀸스 갬빗]은 그녀의 눈빛으로 시작해 눈빛으로 끝이 나는데 때마다의 그녀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숙취로 경기에 집중할 수 없어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이 체스 퀸으로서 자신감과 여유를 담은 눈빛이 되어 나에게 체스를 권한다. 어머! 당장 체스 세트를 사야겠다. 아, 아니다, 안야 테일러 조이가 나온 영화 검색이 먼저다.


마지막으로 [퀸스 갬빗]에서 진지한 의미를 찾겠다고 덤벼도 못할 건 없다. 남자의 것이라고 생각됐던 세계에서 최고가 된 여자인 것도 고무적이고 각종 중독을 극복한 인간 승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꼭 그렇지 않다고 해도 [퀸스 갬빗]은 웰메이드다. 그냥 확.실.히 재미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작가가 시청자에게 너무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