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시작되는 곳, 호카곶

푸른 바다 위 분홍 모자

by MinZhu

대서양을 본 적이 있다. 멀리는 광활하고 가까이는 거친 바다는 감탄을 넘어 두려움을 품게 했었다. 호카곶 Cabo da Roca은 그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다.


버스는 만원이었다. 유라시아 Eurasia 대륙 최서단이라는 상징성은 전 세계 관광객을 불러 모았다. 나도 그들 중 하나로 흔들리는 버스에서 겨우 균형을 잡기를 삼십여 분, 빨간 등대가 도착을 알려 준다. 해안 절벽이 보이는 땅끝으로 빨리 가고 싶지만 바람이 힘이 더 세다. 어쩔 수 없이 천천히 한 걸음씩 걸으니 보이는 것이 있다. 넓게 펼쳐진 구릉 위로 살짝살짝 노란 꽃을 피운 키 작은 풀들이다. 거센 바닷바람에 위로 뻗지는 못했지만 바닥에 붙어 제 삶을 지탱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오지만 잠깐 들르는 것일 뿐, 땅 끝을 지키는 이들은 이 풀들, 약속한 대로 빛을 깜빡이는 등대, 어둠 속에서 그 빛을 의지해 이 곳을 지나는 배들이다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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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9 @Cabo da Roca, Sintra

드디어 바다를 바로 내려다볼 수 있는 곳까지 왔다. 나무로 된 울타리가 있지만 가파른 절벽이 주는 아찔함은 그대로다.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세찬데 하늘과 닿아 경계를 잃은 먼바다는 너무 평온하여 되레 몽환적이다. 십자가 기념탑은 화려하지 않아 더 엄숙하다. 주변은 인증 숏을 남기기 위한 눈치 싸움으로 북적였다. 굳이 보태지는 않고 적힌 문구만 새겼다.


AQUI……

ONDE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CA


여기……

땅이 끝난 곳

그리고 바다가 시작된다.


포르투갈 시인 카몽이스 Luis Vaz de Camoes의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Os Lusiadas]의 일부분인데, 바스쿠 다 가마 Vasco da Gama의 원정을 포르투갈 신화와 엮어 찬양한 애국 대서사시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이제는 모두 안다. 여전히 ‘세계의 끝’으로 이 곳을 표현하곤 하지만 ‘끝’이 아닌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시 바다로 눈을 돌렸다. 그때 쓰고 있던 야구 모자가 바람에 날아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바다는 모자를 삼켰다. 속상한 마음이 전혀 안 들 수야 없었지만 자연 앞에서 단념은 빨랐다. 푸른 바다 위 분홍 모자를 보며 다시 생각했다. 출발할 수 있는 곳, 저 모자는 어디까지 갈까, 이왕이면 멀리 가면 좋겠다. 이번엔 고개를 든다. 망망한 저기 어딘가에 내 흔적이 남겠다.


버스 시간표를 알아보러 안내소에 갔는데, ‘유럽 서쪽 끝에 있었다’는 증명서를 만들어 준다. 카몽이스의 글이 거기에도 적혀 있다. 빨간 도장도 꽤 그럴듯해서 기꺼이 인증을 하기로 했다.


IMG_3823.JPG 2019.04.29 @Cabo da Roca, Sin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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