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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Zhu Mar 06. 2022

직접 해야 하는 말이다.

지난 1월 말 종영한 드라마 [그해 우리는]의 대본집이 도착했다. 최애 드라마를 꼽으라고 하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싶을 만큼 좋았던 작품이라 명장면이 줄을 잇지만 원 대본이 궁금한 장면은 따로 있었다.


EP 16
S#49. 휘영동 골목, 저녁. (2022년 겨울)
퇴근길. 눈이 쌓인 길. 혼자 걷고 있는 연수.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연수  (중얼거리는) 하루 종일 연락 없다 이거지 최웅…(핸드폰을 노려보며) 전화 오기만 해봐.
        안 받아줄 거니까.

연수, 입을 삐죽이며 다시 걷는다. 그때, 걸려오는 전화. 연수, 잽싸게 전화를 받는다.

(중략)

최웅  (F, 말없는)
연수  뭐야? 왜 말이 없어?
최웅  (F) 연수야. 생각해 보니까 내가 못 하고 온 말이 있더라구.
연수  뭔데?

연수, 걸음을 멈춰 선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 지나가고, 연수, 멍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더 갖다 댄다.

연수  뭐라고?
최웅  (F) 들었잖아.
연수  못 들었어. 빨리 다시 말해 봐.
최웅  (F) 사랑해.


‘사랑해’ 일 거라고 시청자들은 이미 짐작했지만 웅의 첫마디를 ‘연수에게만’ 들리게 한 게 인상적이어서 작가와 연출,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궁금했었다. 웅의 마음을 모르지 않지만 수많은 "만약에”를 들어서라도 직접 듣고 싶었던 연수에게는 꼭 필요한 말이었고, 그래서 ‘연수만’ 먼저 듣는 게 왠지 타당해 보였다.


멜로드라마에서 ‘사랑한다’는 대사는 수없이 나오지만 딱 그 부분이 명대사로 기억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주인공의 감정을 줄곧 따라왔기에 충분히 예상할 만해서 곧이곧대로 하는 고백은 사실 좀 뻔하다. 오히려 흔한 일상의 단어들에 마음이 실려 무심히 툭 던져질 때 명대사로 남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 잊지 못하는 ‘사랑한다’가 하나 있다. 무려 1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의 최애 1등을 지키는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한 장면이다.


15부
씬40. 도로, 달리는 차 안, 밤.
지오, 김밥을 세 개를 한꺼번에 운전하는 준영에게 먹여주고.

(중략)

지오  밥이나 먹고 말해.
준영  (한 손으로 운전하며, 가슴 치고) 물, 물.
지오  안전운전에 방해돼. 그냥 참어. (하고, 김밥 먹는)
준영  으이.. (하며, 운전하는) 눈에 붕대 언제 푼대?
지오  곧. (하고 먹는)
준영  그만 먹어, 담 휴게소에서 나 먹을 거란 말야.
지오  사랑한다.
준영  ?!
지오  (따뜻하고, 진지하게) 무지 사랑하고, 많이 보고 싶었고, 미안하고, 그리고 이젠 우리 절대
        (눈가 붉어) 헤어지지 말자. (어색한 웃음, 한숨 쉬고) 휴… 챙피해. (하고, 창가를 보는)
준영  (순간 가슴 찡해져, 눈가 붉어, 앞을 보며, 밥을 씹으며 가는, N) 그때 알았다. 예정된 통속이
        유치가 신파가 때론 절대적으로 필요한 순간도 있다는 걸.


어떻게 봐도 흠잡을 데 없는 현빈(지오 역)과 송혜교(준영 역)지만 김밥을 욱여넣으며 대사를 치느라 결코 예쁘거나 멋있을 장면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화해의 말이나 제스처 없이 다시 연인이 된 두 사람 사이에 꼭 필요한 말이었다. 억지로 은은한 조명 아래 대여섯 번 숨 고르며 각 잡고 뱉는 고백이 아니어서 작가님께 더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두 장면 모두 각 작품에서 최고로 많이 회자되는 장면은 아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꺼낸 건 얼핏 그런 생각이 들어서다. 반드시 직접 말해야 한다고. 말로 해야 아느냐며 민망하단 이유로 피하는 말들, ‘당연히 알’...지 못할 수 있다. 꼭 연인 간이 아니더라도 가족이든 친구이든 ‘가까운’ 사람들끼리는 의외로 자주 바보가 된다. 그냥 문득 미루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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