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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Zhu Mar 15. 2024

‘학전’, 박제가 필요한 이름

이 봐, 거기, 그래 너
내 말 좀 들어봐 줄래 응?
말 꺼내기도 너무 챙피해
아직 아무한테도 말은 안 했지만
아마 너한텐 도움이 될지도 몰라
넌 지금 너무 슬퍼 보여
하지만 너의 슬픔은 곧 사라져
그건 내가 약속할 수 있어
니 얼굴에 쓰였어
자, 용기를 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왜냐면 넌 너무 예뻐
울 때조차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울 때마저도 아름다운 너」 가사 일부다. 주춤한 지 한참이나 뮤지컬 덕후 십여 년 이력에 손꼽는 넘버야 많다. 그러나 단연 그중에서도 앞서는 곡이다. 노래를 듣기는 들어도 부르기는 담을 쌓았으면서도 마음이 다친 날 직접 소리를 내어 스스로를 달래기도 한다. 가사만 봐도 위로가 닿지 않을 수가 없다. 작품에서는 걸레가 자신보다 덜 가엾은 여자, 선녀를 위로하기 위해 부른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한국 뮤지컬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4000회를 넘긴 공연 횟수 같은 기록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진짜의 한국 서민 뮤지컬이기에 그렇다. 그 결은 결국 ‘학전’으로 설명된다. 사실 학전은 비단 뮤지컬뿐 아니라 KBS 심야 음악프로그램의 시초인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를 포함해 김광석, 윤도현, 등 가수들의 공연, <고추장 떡볶이> 같은 아동극, 등으로 한국 대중문화계에서 독보적인 역사를 썼다. 그런데 오늘, 2024년 3월 15일, 극단 서른세 번째 생일에 학전이 폐관했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재정난이 심화됐고 김민기 대표의 건강도 좋지 않아 더 이상 운영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소식을 들었을 때 ‘안타깝다’라는 단어 하나에는 다 담기지 않는 어떤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저 몇몇 작품을 스친 일개 관객이 이럴진대 무대에 올랐던 이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학전의 마지막 무대는 그들의 노개런티 릴레이 공연, <학전 어게인> 콘서트였다. 감사하게도(1) 3월 2일 박학기와 시인과 촌장 공연을 다녀올 수 있었다.


널찍한 로비에 화려하게 꾸며진 포토존과 구색을 갖춘 MD 부스가 요즘은 디폴트일 텐데 ‘학전 블루 소극장’ 대기 장소는 길 옆으로 차 한 대 주차할 만한 넓이의 공간이 전부다. 잠깐 낯설었으니 ‘대학로 소극장’(2)오랜만인가 보다. 밖에서 서성거리다 두 명이나 지날 수 있나 싶은 좁은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기가 여긴 디폴트였다. 보통이라면 하필 꽃샘추위에 떨어야 하는 상황이 불평스러웠으려나, 그러나 ‘학전’이라는 두 글자가 찬 공기를 추위가 아니라 처연함으로 느끼게 했다. 글자가 보이는 대로 카메라를 들이댔던 것 같다. 간판이 내려지고 오랜 후엔 지금 이 모습이 혹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르니깐.


L) 학전 (라이브 콘서트) Again  C) <학전 어게인> 굿즈  R) 그 시절 <지하철 1호선> 티켓


공연은 박학기와 함춘호가 열었고 후반부에 하덕규가 나와서 시인과 촌장의 노래로 채웠다. 중간 타임에 학전 출신인 영화 <기생충>의 지하실 부부, 이정은, 박명훈 배우도 함께 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좋았다.


박학기는 첫 곡을 마치고 무대를 언급했다. 회차마다 출연진이 다르니 내용도 차이가 있을 공연에 공통으로 쓰일 무대는 삼면이 8,90년대 LP로 꾸며졌다. 소극장 콘서트로 뮤지션과 관객 사이의 거리를 좁혔던 ‘학전 라이브 콘서트’를 환기시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박학기는 ‘학전 살리기’를 위해 가장 앞장선 사람으로 <학전 어게인>의 총연출도 맡았다. 누구든 예쁜 무대를 언급할 수 있지만 유물이 된 LP를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는 말은 본인만 할 수 있다. 박학기여서 들을 수 있는 얘기들이 있었고 나서서 수고한 후배 칭찬에 입이 마르지 않던 하덕규의 모습은 이 공연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후배 칭찬만 있었을까? 함춘호의 기타 연주에 노래를 한다는 것에 황송해했던 박학기는 시인과 촌장 무대에서 기타와 하모니카, 간혹 코러스로 함께 했는데 눈빛에 선배들을 향한 존경이 고스란히 담겼다. 하덕규, 함춘호,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감탄하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코로나 시기에 강남대로를 지나다 「풍경」 가사,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을 떠올리며 경탄했다는 류의 이야기들이었는데 얼핏 자화자찬인 듯 농담처럼 뱉었지만 그 진심이 보였다.


이런 이야기들은 결국 ‘김민기’로 귀결됐다. 하덕규는 「사랑일기」를 처음 불렀을 당시 일화를 전하며 ‘선배님은 기억도 못 하실 게다. 그렇게 노래의 영혼을 깨워 준 사람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라고 했다. 또 박학기는 노래 가사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밥 딜런이 오히려 저항 노래로 최고의 가사라고 한 곡이라며 김민기의 「작은 연못」을 소개했다. 이정은의 맑은 음성으로 불렸고 그 가사는 공연장을 잔잔히 울렸다.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어도 김민기라는 사람은 기억해야만 한다. 이전 세대에게는 엄혹한 시대를 견딜 수 있는 노래로, 이후로는 자본에 의해 흘러가는 공연계에서 고집스럽게 수익보다는 사명에 가까운 공연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무대에서 믿고 보는 배우들을 키워냈고 후배 싱어송라이터들의 (하덕규 표현을 빌려) 영혼을 깨웠다. 그래서 그는, 또 학전은 한국 대중문화에서 대체불가한 고유명사가 되었다. 폐관 소식에 가수, 배우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안타까워하며 자발적으로 나서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그리고 나는 그 어마한 이름의 마지막 프로그램을 관람할 수 있어서 너무 슬프게 행복했다. 이제 여운이 남기는 것은 마음에나마 ‘학전’, 두 글자를 박제하겠다는 다짐이다.


부연

취지가 명확한 공연이라 자칫 무거운 분위기를 상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진 않았다. 「가시나무」를 들으면서는 눈물을 흘렸지만, 솔직히 눈물이 안 나면 더 이상할 곡이다, 박학기의 「비타민」과 시인과 촌장 「사랑일기」는 관객 모두 신나서 떼창을 했다. 이정은, 박명훈, 두 배우가 함께 한 시간을 포함해 모든 토크는 유쾌했다. 정말이지 공연은 그 자체로 더없이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앵콜로 「고양이」(3)를 불러줘서 마지막에 또 입틀막이었다.


(1)   마땅히 감사할 것이 정말 손꼽게 어려운 티켓팅이었다.

(2)   대학로라도 최근 올라간 건물에 자리한 소극장들은 보통 실내에 로비를 갖추고 있다. 다만 ‘대학로’라는 이름이 담은 색깔의 옛 극장들을 가리키고자 굳이 ‘ ’를 달았다.

(3)   집사는 아니지만 고양이를 찬양한 노래 중 가장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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