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애써 외면했던 콤플렉스는 게임 속에서 더욱 극대화된다. 그래서 게임을 하다 보면 보기 싫은 내 모습과 마주칠 때가 많다.
이벤트* 와 함께 게임을 시작하는 신규 유저에게는 보통 가이드 미션이 주어진다. 주요 관광지에서 시행하는 스탬프 투어와 비슷하게 게임 내 컨텐츠를 한 번씩 체험해 보게끔 유도하는 역할이다. 미션 완수 시 주어지는 보상이 꽤 쏠쏠하여 돈도 인맥도 없는 뉴비에게는 미션 하나하나가 정말 소중한데, 나는 로스트아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가디언 토벌 1회 완료'라는 미션을 수행하지 못해 꽤 마음고생했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다른 미션들과 달리 '가디언 토벌'은 모르는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레이드' 컨텐츠였기 때문이었다.
MMORPG의 큰 재미 요소 중 하나인 '레이드'는 플레이어 여러 명이 합심하여 보스 몬스터를 공략하는 컨텐츠이다. 한 명이 실수로 죽어버려도 남은 플레이어끼리 보스 몬스터를 잡아야 하는 구조라 참여자 모두가 죽지 않고 제 역할을 잘하는 게 특히 중요하다.
내가 저지른 실수로 인해 레이드 공략이 완전히 실패할 수도 있다는 점은 초보인 내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유튜브에서 가디언 토벌 공략 영상을 공부하듯 시청하고, 달달 외웠음에도 끝까지 '매칭** 신청' 버튼을 누르지 못한 이유다. 마우스 포인터를 올려놓고 '딸깍' 클릭만 하면 되는 건데도 미숙한 실력으로 도전했다가 공략에 실패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질타받는 장면이 자꾸 상상됐다. 등신, 머저리. 그토록 철저히 준비하고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내가 너무 바보 같아 화가 났다.
가디언 토벌을 준비하며 느꼈던 분노는 단순히 게임 컨텐츠 하나를 못 해서 일어난 감정이 아니었다. 현실에서 만들어진 콤플렉스의 연장선이었다.
언젠가부터 회사에서 새로운 일이 주어지면 긴장이 됐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시간을 사전 조사에 썼다. 공식적인 납기를 어긴 적은 없어도 '언제까지 해야겠다'고 스스로 정한 기한은 항상 어겼다. 그래서 모든 일들이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제대로 하지 못한 일'로만 보였다. 일을 끝낼 때마다 뭔가를 해냈다는 느낌은 없고 미미한 좌절감과 실망이 쌓였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부러 '다음엔 더 잘해야겠다!'는 발전적인 목표를 세웠다. 겁 없이 내지른 포부가 다음번 과제의 발목을 잡는 줄도 모르고 긍정과 성장이란 단어를 움켜쥐며 악순환을 거듭했다.
다뤄주지 않은 좌절과 실망, 자기 비난은 서로 엉겨 콤플렉스가 됐다.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탄생한 콤플렉스는 어느새 일을 잘하지 못하는 '나'를 비난하는 데 쓰였다. 쉬워 보이는 일에도 긴장하는 스스로가 불량품처럼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는데, 위로의 말을 뱉으면 내가 정말 '하자가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디언 토벌은 애써 외면했던 나에 대한 의심을 정통으로 건드리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게임을 '별거 아닌 것'으로 여겨왔던 나는 '고작 게임 따위'에 고전하는 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무시하던 대상을 손쉽게 해치우지 못하는 상황 자체가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라는 명제를 뒷받침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고 더 화가 났다.
얼마 안 있어 친구의 도움으로 어영부영 가디언 토벌을 완료하긴 했지만, 나는 새로운 레이드를 앞둘 때마다 비슷한 내적 갈등을 반복했다. 공략을 숙지하고, 실수할까 봐 걱정하고, 그 모습을 한심해하며 열등감을 키웠다. 그 감정에서 비롯된 고통이 레이드를 하며 얻는 재미를 상회할 무렵, 나는 게임을 그만뒀다. 아주 도망쳐 버렸다.
당시의 상황을 담담히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흐르고, 나는 '그때 그 마음 좀 달래 줄걸.'하고 참 많이 후회했다. '고작 게임'이라는 경멸 섞인 인식이 '잘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얼마나 초라하게 만드는지 너무 늦게 알았다. '나 지금 실수할까 봐 부담되는구나.' 혹은 '잘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잘 안 돼서 속상하구나.' 상냥히 말 걸어주었다면 불안을 내려놓고 신나게 게임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후회 섞인 위로를 몇 번이고 곱씹은 후에야 게임이 내게 소중했음을 받아들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매주 레이드를 하며 느낀 불안은 의외의 방향으로 현실에 도움을 주었다. 내적 갈등에 노출된 절대적인 횟수가 늘어나 그 감각 자체가 익숙해져서 그런지, 나는 현실에서 자기 비난이 시작되는 순간을 좀 더 잘 알아차리게 됐다.
얼마 전 회사에서 처음 해보는 일을 맡은 적이 있다. 빠듯한 시간과 '적어도 전임자만큼 해야 한다'라는 스스로 지운 부담 속에서 나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곤 했는데, 습관처럼 나를 힐난하다가 그 순간을 인지하고 멈춰보았다. 비난에 의한 감정 소모가 평소보다 이르게 없어지자 훨씬 수월하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마음이 생겼다.
게임을 하기 전이었다면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사정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였을 것이다. 이제는 '사소한 실수'라는 프레임으로 여러 속상한 감정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스스로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게 됐다. 비록 처음 기대했던 것처럼 완벽한 모양새로 일을 끝내진 못했지만, 나는 허술하고 얼렁뚱땅한 결과물을 앞에 두고도 아주 오랜만에 성취감을 느꼈다.
미래의 어느 날 내가 다시 게임을 하게 된다면 이전과 비슷한 이유로 게임을 그만두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게임이 현실에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콤플렉스를 극복한 내가 게임 속에 다르게 비칠 것이었기에.
* 이벤트 : 신규 유저의 유입을 늘리기 위해 게임사에서는 주기적으로 성장 지원 이벤트를 개최한다. 일반적으로 여름과 겨울에 한 번씩 진행한다.
** 매칭 : 여러 명이 진행해야 하는 레이드 컨텐츠의 특성상, 같이 공략할 인원을 랜덤 매칭해주는 기능을 제공한다. 로스트아크의 경우 '매칭 신청' 버튼을 누르면 비슷한 시점에 매칭 버튼을 누른 유저를 무작위로 묶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