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솔아 Oct 17. 2023

길드 가입을 망설였다.


로스트아크를 플레이한 지 3주 정도 지났을 때 '길드… 가입해 볼까?'라는 생각이 슬쩍 들었다.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중학생 때 길드 생활을 열심히 해봤던 나는 길드가 얼마나 재밌고 중독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로스트아크를 시작한 이유가 연초의 무기력을 빠르게 탈피하기 위해서인 만큼, 플레이 기간이 길어질 만한 요소를 더 이상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성적 판단에 의하면 분명 그랬는데, 자꾸만 길드 모집 글에 정신이 팔렸다. '가입하면 안 돼!'라고 되뇌면서도 연어처럼 되돌아가 모집 글을 확인하는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길드에 가입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곱씹으며 내 마음을 단속하고자 했다. 가장 효과가 좋았던 건 역시 '길드는 불순하다'라는 인식이었다.






나는 수능을 준비했던 열아홉 살 때부터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스물여섯 살 때까지 게임과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았다. '성공한 미래' 혹은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일부러 게임을 멀리하던 시기였다. 그래도 가끔 게임 관련 정보를 찾아볼 때가 있었는데, '어그로•'와 같이 게임 속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어쩌다 마주칠 때였다. 나는 한눈에 이해되지 않는 용어들을 인터넷에서 꼬박꼬박 찾아보며 게임과의 약한 연결고리를 이어갔다. 그러다 우연히 '여왕벌'과 '넷카마••'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는데, 게임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 일부 영향을 끼칠 정도로 그 뜻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여왕벌'은 남성 유저가 많은 게임 속에서 본인이 여자라는 사실을 어필해 혜택을 받는 여성 유저를 칭하는 용어였다. (현실의 '꽃뱀'과 대치되는 용어일 듯 하다.) '넷카마' 는 이를 역이용해 여자인 척하여 혜택을 받는 남성 유저를 칭하는 용어였다. 


나는 두 단어를 알기 전까지만 해도 게임 내 이성 관계가 존재할 것으로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길드에 가입해서 활동했을 때의 나는 어리기도 했고 성에 좀 늦되기도 해서, 그 속에서 만난 사람을 모두 친구 내지 아는 사람으로만 여겼었다. 게임 속 관계를 오로지 우정의 의미로만 해석해 왔었기에 게임 속 이성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마주했을 때 매우 당황스러웠다. 이어서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두 단어의 실질적 사례를 찾아볼수록 속이 울렁거렸지만, 찾아보는 행위를 멈출수 없었다.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기어코 열게 만드는 자기 파괴적인 호기심과 비슷했다.


두 단어는 '길드에 여왕벌이 있어서 짜증 난다.' 혹은 '길드에 여왕벌 짓 하던 사람 알고 보니 넷카마였다.' 등 부정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다. 나는 두 단어의 용례와 그에 대한 비난을 남김없이 흡수했다. 곧 '여왕벌'과 '넷카마'가 나쁘다는 인식은 물론이고, 그런 현상이 생기게끔 공간을 제공한 '길드' 자체도 불순하다고 생각했다. 등산 동호회가 불륜의 온상지라는 말을 듣다 보면 어느새 '등산 동호회' 자체에 색안경을 끼게 되는 것처럼, ‘길드’에서 파생된 다양한 치정 사례를 읽으니 그 자체가 불순하게 느껴졌다. 이때 생성된  '길드는 불순하다'는 인식은 시간을 먹고 숙성되어, 훗날 로스트아크에서 길드 가입을 주저하게 만드는 주원인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입견을 뛰어넘을 만한 '길드에 가입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거의 2주 가까이 길드 가입을 망설였는데, 결국 고민하다 지쳐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한 길드에 가입 신청을 했다. 가입 문의를 하면서도 내 선택이 떳떳하다는 생각을 못했다. 그러나 길드에 가입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해소되지 못한 의문에 대한 답을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었다.


비록 게임을 멀리하는 동안 모두 끊겨버렸지만, 나는 과거 길드에서 만났던 온라인 인연들을 참 좋아했다. 하교 후 집으로 달려갈 때의 땀방울, 게임에 접속하기 직전의 설렘, 따로 약속하지 않아도 게임 속에서 만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어느새 비슷해진 채팅 말투, 기분 내킬 때만 던전을 돌러가는 게으름, 그 모든 것을 지탱하는 게임에 대한 애정이 살면서 내내 그리웠다. 그 시간을 재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기억이 너무 좋게 남아있어 그냥 다시 한번 길드에 가입하고 싶었다. 


그 마음을 인정해 주니, 과거 길드에서 좋은 추억을 남겼음에도 생면부지의 의견에 휘둘린 내가 부끄러워졌다. 세상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지나치게 귀가 얇은 모습은 내가 싫어하는 내 특성 중 하나였다. 왜 직접 겪은 경험을 믿지 못했던 걸까? 아마 내 감정이나 경험으로 판단 내렸던 적이 별로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늘 결정 앞에서 '옳은 길' 혹은 '합리적인 길' 처럼 다른 사람이 제시한 의견을 따라가곤 했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길드에 가입해야 하는 이유를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내가 길드 가입을 결국 '선택'했다는 점이었다. 내 경험과 감정을 따르는 게 개발이 필요한 영역이라면, 나는 그전까지 내 망설임을 믿겠다. 속도는 좀 느릴지언정 쉽게 단념하지 못하는 끈질긴 마음이 결국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를 인도할 것이다. 






• 어그로 : 이목을 집중 시키는 행위. 과거 게임에서 보스 몬스터의 이목을 끌어두는 일을 지칭하다가 요즘에는 인터넷에서도 흔히 쓰이게 됐다.

•• 넷카마 : 인터'넷' + 오카마(여장남자를 뜻하는 일본어), 즉 인터넷상에서 여자인 척하는 남자를 뜻한다.



이전 07화 게임에서 배운 인생 태도 한 가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