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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솔아 Oct 18. 2023

요즘은 게임을 하면서 통화를 한다.


어렸을 때부터 '사오정'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을 만큼 듣는 귀가 둔했다. 통화 음질이 떨어졌던 과거에는 상대방이 말할 때마다 '뭐라고?' 되묻기 미안해서 알아들은 척 넘어갔던 적이 부지기수였다. 한때 상대방과 목소리를 나누는 행위가 내밀한 호의를 드러내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내가 듣는 어려움을 참으면서까지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는 일이라고 의미 부여를 했기 때문이었다. 통화 품질도 좋아지고 업무상 통화도 많이 하게 되면서 그런 시혜적인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지만, 여전히 '통화'는 내가 선호하는 의사소통 방식이 아니었다.


한창 길드 모집 글을 훑어볼 때, 가장 당황스러웠던 점은 대부분의 길드가 '디스코드' 참여를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디스코드는 게임 할 때 많이 사용한다는 메신저로, 그룹 음성 통화 외 다양한 기능을 제공한다고 했다. 통화를 원래부터 즐기지 않아서였을까. '디스코드 필참' 조건이 길드 가입에 큰 진입장벽으로 다가왔다.


'게임을 하면서 통화를 한다'는 개념이 아주 낯선 건 아니었다. 십오 년 전, 온라인 게임에서 사귄 친구 자누가 게임에서 알게 된 동갑 남자애와 스카이프로 통화를 했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내심 깜짝 놀랐었는데, 첫째로는 채팅으로 대화가 가능한 상태에서 굳이 스카이프까지 깔아 통화를 한 이유가 궁금해서, 둘째로는 '아무리 동갑이라도 온라인에서 알게 된 남자와 전화하는 건 좀 위험하지 않나?'라는 생각에서였다. 자누의 말을 듣고 '게임 중 통화'의 세계에 호기심이 일었지만, 앞의 두 가지 의문이 해소되지 않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나는 사춘기의 은밀한 호기심을 이성으로 억누를 정도로 고지식한 학생이었다.


디스코드가 아예 없는 길드를 제쳐두고 '디스코드 필참'인 길드를 선택하면서도 이게 잘하는 일인지 마지막까지 의심했다. 열다섯의 내가 '게임 중 통화'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서른의 나 또한 그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후자를 골랐던 건 십오 년을 묵힌 호기심의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서른 살에 게임을 하는 것도 이토록 부끄럽고 죄스러운데, 몇 년 뒤 내가 계속 게임을 할까 싶었다. 새로운 세상에 처음이자 마지막 발을 내딛는 것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길드에 가입 신청을 했다.






길드 디스코드의 초대 링크를 받고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했다. 듣기만 할 요량으로 '디스코드는 필참이되 마이크 참여가 자유'인 길드를 선택한 거지만, 혹시 몰라 싸구려 마이크 하나를 미리 꽂아놓고 디스코드 프로그램을 켰다. 처음 보는 낯선 화면에 잠깐 얼었다가 왼쪽에 위치한 메뉴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클릭해 보았다. 공지사항, 채팅방, 스크린샷… 메뉴 자체는 기존 카페 게시판과 비슷하여 친숙했는데 게시글 목록이 있어야 할 영역에 채팅창만 있어서 꽤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이미지를 주로 다루는 '스크린샷' 메뉴도 익숙한 격자 모양 사진첩이 아니라 채팅창에 일렬로 사진이 올라와 있는 형태였다. 다음 카페와 인스타그램 피드가 요상하게 섞인 모양에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낄 때였다.


갑자기 '딩동' 소리가 나더니 "어? 새로운 분 오셨다! 안녕하세요?!"라는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와~ 새로운 사람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러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말문이 막힐뻔했지만 일단 "안녕하세요" 인사부터 했다. 긴장으로 목구멍이 조여져 염소 같은 소리가 났는데, 마이크가 싸구려라 문제가 있었는지 바로 "목소리가 잘 안 들려요! 이거 해보세요", "저거 해보세요!" 알려주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알고 보니 디스코드는 텍스트로 채팅하는 메뉴(메뉴 이름 앞에 '#')와 음성으로 대화하는 메뉴(메뉴 이름 앞에 '스피커')를 아이콘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둘의 차이를 정확히 몰랐던 나는 메뉴 탐방을 하다가 음성 대화 채널에 호기롭게 입장한 거였고, 마이크를 끄는 법도 몰랐기 때문에 얼떨결에 그대로 대화에 참여하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시선을 모았던 건 아주 잠깐이었다. 신입 길드원에게 물어볼 수 있는 기본적인 질문-"(게임 속)직업이 뭐예요?", "레벨이 몇 이에요?" 등-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내가 입장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때로는 청자가 명확했고, 때로는 혼잣말하는 듯했다. 일반인의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를 듣는 건 상상 이상으로 낯 뜨거운 일이었다. 사람들의 대화가 쉴 새 없이 공기를 채웠지만, 그래서 더 '내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의식되었다. 그렇다고 아무 말이나 하자니 꼭 허공에다 혼잣말하는 기분이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정말 진지하게 길드를 탈퇴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나는 길드 가입을 망설였던 시간과 비장한 마음이라는 비용을 이미 지불한 상태였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다잡으면서 최선을 다해 디스코드에 적응해 보자고 다짐했다.


처음에는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귀에 익히고, 그 사람들의 게임 캐릭터 명과 직업을 외웠다. 이어서 말투나 억양, 지나가듯 얘기했던 소소한 이야기를 잊지 않으려 애를 썼다. 얼마 안 있어 내게 말을 잘 걸어주는 외향적인 사람과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내향적인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했다. 더 시간이 흐르자, 누가 누구랑 친하고, 이 사람은 어떤 성격이고, 저 사람은 어느 시간대에 접속한다와 같은 세세한 정보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되돌아보니, 어느새 길드에 스며들어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게임을 하면서 통화한다'는 감성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디스코드'라는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했던 노력으로 인해 길드원들은 내게 특별해졌다. 모르는 사람과 하는 통화는 버텨야 하는 일일 뿐이지만, 특별한 사람과의 대화는 즐겁고 재미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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