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과 대화하며 게임을 하는 건 정말 이상한 매력을 가졌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았는데 일정 구간을 넘기자 오히려 현실보다 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게임 속의 나는 '나이되 내가 아니어서' 그런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게임 속에선 기본적으로 모니터 뒤에 있는 사람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사람들과 교류할 때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모되던 정보는 모두 게임 속 정보로 대체된다.
현실의 내 이름은 캐릭터의 이름으로, 나의 생김새는 캐릭터가 입고 있는 꾸미기용 아이템이 대신한다. 내가 몇 살이고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보다 내 캐릭터 레벨이 몇이고, 게임 속 직업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현실에서 자주 만나기 위해 행동반경과 소비 수준이 비슷해야 했다면, 게임 속에서 비슷해서 좋은 건 접속 시간과 캐릭터의 스펙(강한 무기나 장신구 등), 레벨 정도 밖에 없다.
게임 속에서 나는 '서울에 사는 3N살 연구원 원솔아'가 아니라 '오후 8시~12시에 접속하는 레벨 150의 인파이터 구팔님'으로 여겨졌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이 언제쯤 게임에 접속하는지, 레벨이 비슷해서 컨텐츠를 같이 수행할 수 있는지, 내 캐릭터의 직업과 상성•이 좋은지 등을 먼저 떠올렸다.
게임 속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상대방이 나를 실제로 아는 것도 아닌데 나에 대해 상당히 잘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이름, 나이, 직업, 외모, 소득, 취미 등 현실에서 '나'를 정의 내리던 모든 정보는 사라졌지만, 내 캐릭터의 행동은 '나'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나는 시간 관리 플래너를 10년 가까이 써왔을 정도로 계획을 세우고 효율적으로 해치우는데 진심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로스트아크를 플레이 한 기간에는 플래너를 펼친 적이 손에 꼽았다. 그런 스스로를 '게을러졌다'며 은연중 한심해했었는데, 자각하고 보니 현실에서 하던 행동을 게임에서 그대로 하고 있었다. 로스트아크 전용 To-Do 프로그램으로 매일 해야 하는 컨텐츠를 체크하고, 목표했던 일을 마치면 상대적으로 우선순위가 낮은 컨텐츠를 해나갔다. 어느 날 같은 길드 사람이 "길드에서 구팔님처럼 쉬지 않고 뭘 하는 사람은 없을걸요?"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모두가 나처럼 게임을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게임 속에서 나는 현실 '원솔아'의 행동을 했고 게임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 행동을 보고 '구팔'이라는 캐릭터를 정의했다. 나의 행동으로만 내 정체성이 정해진다는 건 엄청난 해방감으로 다가왔다. 사회적 껍데기를 다 벗어던지고 나의 알맹이로만 교류하는 느낌. 한 때 바로 '여기'에 내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앞서 '게임 속에선 모니터 뒤의 사람을 궁금해하지 않는다.'라고 썼지만, 사실 게임 속 지인의 현생은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은 영역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다. 사는 지역이 나와 비슷하다든지 일하는 분야가 겹친다든지, 상대방의 익명성이 지켜지는 선에서는 확실히 흥미를 느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현실의 누구인지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정보는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언젠가 길드원이 급하게 골드(게임 머니)를 필요로 하길래 수중에 있는 골드를 판 적이 있었다. 길드에서 꽤 오래 본 사람이라 나름 내적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계좌에 찍힌 상대방의 실명을 보자 왠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상상하던 '○○님'의 이미지가 일러스트에서 사진으로 변하는 것 같은 느낌? 서둘러 은행 앱을 끄고 머리에 남은 그 사람의 이름을 의식적으로 몰아냈다. 나 자신도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나 왜 이러지?' 곱씹으면 그 이름이 오히려 더 선명해질까 봐 일부러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행동을 이제 와 추리해 보면, 나는 게임이 내 '도피처'라는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게임 속에서 '나이지만 내가 아닌 존재'로 활동할 때만큼은 현실에 종속된 것들, 예를 들어 승진에 대한 스트레스나 미래에 대한 불안, 완벽함에 대한 집착, 자기혐오 따위를 잊을 수 있었다. 나는 게임과 현실을 더욱 철저히 분리했고, 게임이 현실보다 더 중요한 일인 양 굴었다. 그럴수록 현실에서 마주치는 괴로움을 쉽게 무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을 별개의 영역으로 취급함으로써 현실에서 발생하는 감정 소모를 극단적으로 줄였던 내게 게임 속 지인의 이름은 영화 <인셉션>의 킥••처럼 현실의 삶을 일깨웠다. 온 힘을 다해 게임에 매달려도 결국 현실에 딸린 부수적인 세계일 뿐이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게임 속 지인의 현생이 알고 싶지 않은 거였다. 나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 게임 직업별로 가지고 있는 능력과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게임 내에서도 직업 간 상성이 존재한다. 현실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PM으로만 멤버를 구성하지 않고 PM, 디자이너, 엔지니어를 나눠서 구성하듯 게임 속에서도 컨텐츠를 같이 수행할 멤버를 모을 때 상성을 고려한다.
•• 킥(Kick) : 꿈속에서 현실로 빠져나오게끔 하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