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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솔아 Sep 20. 2023

게임을 시작하다.


스물아홉 끝자락, 승진 누락이 확정됐다. 입사 이래 일과 인간관계가 가장 버거웠던 해였다. 승진할 수 없을 거라 예상했는데도 진급 누락을 실제로 맛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속이 쓰렸다.


해가 바뀌어 서른, 팀 내에서 승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 됐다. 새해 첫날 주어지는 짧은 연휴 동안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일 년만 잘 버티면 승진할 수 있다는 계산에 기대 보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스트레스로 만신창이가 된 위장과 퇴색된 열정, 무기력으로 가득 찬 정신을 가지고 작년처럼 열심히 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힘들다고 멈추면 눈앞에서 기회를 놓친 머저리밖에 되지 못한다. 


왠지 모르게 울적한 기분이 들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켰다. 자극적인 섬네일이 주르륵 펼쳐졌지만 어떤 영상도 보고 싶지 않아 스크롤을 몇 번 내리다가 앱을 껐다. 즐겨보던 웹툰이라면 좀 다를까 싶어 웹툰 앱을 이어서 켰다. 바빠서 제때 챙겨보지 못한 웹툰이 잔뜩 쌓여있었지만 어떤 것도 누르고 싶지 않았다. 결국 뜬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그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사실은 훨씬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사람이 으레 그렇듯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못 견뎌했다. 내게 공허는 평안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텅 빈 시간이 쉼이 아니라 낭비처럼 느껴져서, 빈 시간을 채울 어떤 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타이밍 좋게 친구 K가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K : "로아 찍먹하실 분?"


K는 로스트아크가 한참 이벤트 중이라며 같이 할 사람을 구했다. 과거에 로스트아크를 참 재밌게 했었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가만히 누워있는 것보다 뭐라도 하는 게 생산적인 것 같아 "안 그래도 요즘 할 거 없었는데 한번 해볼까?" 가볍게 답했다. 한 2주 정도 빠져있다가 일상생활로 복귀하면 문제없으리란 판단이 빠르게 섰다.






로스트아크는 MMORPG*, 각자 선택한 직업(RP)을 가지고 온라인에서 사람들과 함께(MMO)하는 게임(G)이었다. 직업마다 차이가 존재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가 가능한 MMORPG는 초반에 어떤 직업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게임 후반의 희비가 엇갈리는 장르기도 했다.


K가 보내준 직업 선택 가이드 영상을 시작으로 여러 개의 직업 추천 영상을 꼼꼼히 살펴보다가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승진을 앞둔 이 시기에 게임에 진심이 되면 안 된다고, 딱 2주만 하고 끝내야 한다고 되뇌면서도 어떤 직업을 할지 진심으로 고민하는 내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였다. 가볍게 하자고 마음먹어도 무겁게 임하고야 마는 고질병이 또 도진 게 지긋지긋했다.


평소였다면 "나 왜 진심이야?" 웃고 넘겼을 텐데 몸과 마음이 엉망이어서 그런지 쓸데없는 곳에 힘을 쏟는 내 모습이 갑자기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는 보던 영상을 멈추고 캐릭터 하나를 대충 만들기로 결심했다. 일종의 반발심이었다.


캐릭터 커마**에 신경 쓴 사람처럼 보이기 싫어 일부러 기본으로 제공되는 외형을 그대로 썼다. 제일 예뻐 보이는 외형을 찾느라 시간이 좀 걸렸지만, 충분히 대충 만든 것처럼 보여 마음에 들었다. 캐릭터 이름을 위해 습관처럼 의미 있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다가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책상 위 영양제 이름을 변형해서 사용했다. 충분히 성의 없어 보이는 닉네임이 탄생했다.


나중에 게임 속에서 정말 대충 만든 캐릭터들을 보고 나서야 내가 '캐릭터를 대충 만드는 것'마저 최선을 다했음을 깨달았지만, 당시에는 지지부진했던 캐릭터 생성을 마음먹고 끝내버린 것이 꽤 만족스러웠다.


캐릭터 생성에 진을 빼서 그랬을까? 급격히 밀려오는 피로감에 화면 속 캐릭터를 몇 번 움직여 보다가 그대로 컴퓨터를 껐다. 들인 시간 대비 김 빠지는 플레이에 다시는 게임에 접속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침대에 누우며 덤덤히 생각했다. '그래도 게임에 접속은 해봤으니 K한테 할 말은 있겠네'



승진에 가장 중요한 한 해를 꼬라박고, 인생의 전부인 양 매달리고, 울며불며 미련 넘치는 글까지 쓰게 만든 게임의 시작이었다.






* MMORPG : 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

** 커마 :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 게임 캐릭터의 외형(헤어스타일, 얼굴 생김새, 피부색 등)을 지정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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