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로스트아크에 빠졌을 때 나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굴었다.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 자꾸 말하고 싶은 것처럼 어딜 가든 로아 얘기를 하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어제 로아를 얼마나 했는지, 내가 요즘 얼마나 로아에 홀릭 중인지, 로아가 얼마나 대단한 게임인지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그러다 보면 '아, 이건 말 안 하려고 했는데...'라는 후회가 번번이 드는 지점이 생기는데, 바로 '게임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SNS로 관계를 맺는 게 흔해진 요즘이지만 나는 여전히 '온라인으로 사람과 교류하는 것'에 터부가 있다. 아마 '온라인 관계'에 대한 내 초기 기억이 '떳떳하지 않음'부터 시작해서 일 것이다.
중학생 때 처음으로 게임 내 소모임인 길드(Guild)에 가입하였다. 그곳에서 동갑 여자아이 '자누'를 알게 되었는데, 성향이나 취향이 놀랄 만큼 비슷했던 우리는 누구보다 빠르게 친해졌다. 우리는 언니를 둔 동생이 느끼는 비애나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진심, 남몰래 간직한 비밀 등을 얘기하곤 했다. 모두 친구 간에 충분히 나눌만한 대화 주제였지만 이상하게도 반 친구들에게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주제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대화하기 편한 자누에게 큰 친밀감을 느꼈다.
그런데도 나는 '자누'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비밀로 했다. 온라인에서 친구를 사귄 행위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은연중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관계의 정의가 넓어지는 대학 시절까지 자누와의 친분이 이어졌더라면 온라인 관계를 비정상으로 여기는 인식이 차차 해소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관계를 떳떳하게 여기지 못한 내 마음 상태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누와 나는 대학 진학 후 서서히 멀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쭉 게임과 담쌓고 살았던 나는 '온라인 관계'에 가지는 반감을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십 년쯤 지나 로스트아크를 다시 시작했을 때도 학생 때와 다를 바 없이 생각하고 행동했다.
길드에서 만난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로스트아크가 더 재밌어졌지만 현실 지인들에게는 게임 자체가 재밌어서 홀딱 빠진 사람을 연기했었다. 처음에는 '게임 속 사람들이랑 친해졌다고 굳이 얘기할 필요 없잖아?'라며 꺼림칙한 마음을 애써 눌렀었는데, 게임 속 사람들과 친해질수록 떳떳하지 못한 마음을 숨기기 위한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나는 학창 시절 깊은 유대를 나눴던 자누와의 관계를 끝까지 지키지 못해서 무척 후회했었다. 새로 사귄 친구들을 똑같이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무엇이 나를 이토록 부끄럽고 초라하게 만드는지 되돌아봐야 했다.
중학생 때 같이 어울리던 무리에게 외면당한 적이 있다. 학기 초 성향이 맞지 않은 친구 간에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었지만 당시에는 그 일을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데 실패한 사건'으로 여겼었다. 내게 어떤 결함이 있기 때문에 친구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한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상적인 관계'에 집착했었다. 내 사회성에 문제가 없음을 증명해야 나의 결함이 없어지는 거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게 '정상'은 주변 아이들과 비슷해진다는 뜻이었다. 중학생 대부분은 같은 반, 같은 학교, 같은 학원 등 현실에서 직접 만난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 나 또한 길드에 가입하기 전까지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만 친구를 사귀는 일반 학생이었다.
그러다 자누와 친해졌고, 나는 내가 '정상'의 범위를 살짝 벗어났다고 느꼈다. 그 느낌은 일탈을 한 것과도 비슷해서, 친구들이 상상도 못 하는 영역에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소소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자누와 돈독해질수록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생겼다. '정상적인' 친구들은 온라인에서 알게 된 친구와 끈끈해지기는커녕 친구가 될 생각조차 안 할 거라는 조롱이 자꾸 생각나서였다. 누구도 내게 실제로 말한 적 없는, 스스로 던지는 비난이었다. 결국 내가 온라인 관계를 꺼렸던 근본적인 이유는 타인의 평가-'얼마나 사회성이 없으면 온라인에서 친구를 만날까?'-를 빙자한 자기 검열 때문이었다.
습관이 된 자기 검열을 멈추기 위해 왜 자누를 현실 친구들보다 편하게 느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단연 '게임'이라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나는 게임을 좋아했고, 내 주위엔 게임을 하는 여자애들이 한 명도 없었다. 좋아하는 게임에 대해 실컷 말할 상대가 없다는 건 상당히 외로운 일이라 자누를 알았을 때 순식간에 그 관계에 빠져들었다.
중학생 때 겪은 교우관계 문제로 인해 나는 사회성이 뛰어난 관계 지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이 되며 알게 된 '나'는 애초에 관계 지향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 관심사가 겹치는 사람에겐 비할 데 없는 친근감을 느끼지만, 공통점 하나 없는 사람에겐 인간적인 호기심도 생기지 않는 '관심 지향적'인 사람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 하나의 취향도 겹치지 않던 주변 친구들과 사교적으로 지내야 했던 교실 환경이 내게는 좀 버거웠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비슷한 관심사가 없으면 서로 스칠 일도 없는 온라인 관계가 오히려 내게 더 맞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사회성'과 '증명'은 처음부터 호응하는 주술 관계가 아니었는데, '사회적이어야 해!'라는 자기 증명에 대한 압박으로 나는 너무 오랫동안 내 모습을 꾸며왔다.
내가 선호하는 관계 방식을 알게 되니 마음속 부끄러움이 한결 정리된 느낌이 들었다. 다만, 오래 품은 믿음은 의식 전체에 스며들어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수치스러움을 무릅쓰고 이 글을 썼다.과거에 온라인 게임 속에서 친구를 사귀었고, 성인이 된 지금도 때때로 현실 사람보다 온라인 친구에게 더 큰 각별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미래의 나에게,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이 글은 내 정신에 하는 일종의 패치* 이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타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패치(Patch) : 게임 같은 프로그램에서 어떠한 수정이 필요할 경우 재설치 없이 일부 파일이나 소스코드를 변경해 프로그램의 내용을 바꾸는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