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좋아한다'는 취향이 부끄러워서 숨기고 다닐 때가 있었다. 학교와 학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온라인 게임에 할애했는데도 그 사실을 아는 친구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어쩌다 게임 얘기가 나와도 모르는 척, 관심 없는 척 내숭을 떨며 게임과 아예 상관없는 사람인 양 행동하기도 했다.
여자들이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옷이나 헤어스타일, 신발과 가방, 화장품 등에 관심을 두지 않고 고작 게임 따위에 열정을 쏟았다는 게 흠결처럼 느껴지던 시간이었다.
언제부터 내 안에 그런 인식이 생겼던 걸까?
중학교 2학년 때 자리가 가까웠다는 이유로 무리를 형성했던 친구들은 나와 매우 달랐다. 외모에 관심이 커지는 시기답게 그 아이들은 옷과 헤어스타일, 다이어트 등에 관심이 많았고, 나는 허구나 공상의 세계를 다루는 게임이나 만화책, 소설 등을 더 좋아했다.
관심사가 너무 다른 우리의 대화는 항상 삐걱거렸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게임에 관심 가져본 적 없는 친구들은 내가 꺼내는 게임 얘기에 무관심했다. 마찬가지로 옷이나 신발, 가방 브랜드에 관심 없던 나는 친구들이 하는 쇼핑 얘기가 하나도 재밌지 않았다. 새로운 옷을 샀다는 말에 맞장구를 치기는커녕 "잘 모르겠다."로 일관하는 내 모습은 무리의 신경을 거슬렀고,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고 두 달가량 지났을 무렵 나는 무리에서 타의로 떨어져 나갔다.
무리를 형성하지 못한 아이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날 만큼 괴롭히는 경우는 생각보다 없었고 대부분 최소한의 친절과 적당한 거리만을 허용했다. 하여, 홀로 남은 내게 아무도 다가오지 않을 거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벗어나려면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쳐야 했다.
나는 얼마 안 있어 다른 무리로 갈아탈 수 있었지만, 단 며칠 동안의 기억과 감정은 내내 나를 괴롭혔다. 무리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을 때 아닐 거라고 되뇌었던 가냘픈 믿음이 한심스러웠고, 혼자라는 사실을 매 순간 뼈저리게 느꼈던 쉬는 시간의 차가운 소음이 굴욕스러웠다. 짝을 지어 활동해야 하는 체육 시간이 다가왔을 때, 인사 나눈 게 전부였던 같은 반 친구에게 나랑 놀아달라고 부탁하며 울었던 그 순간은 너무 수치스러워서 떠올릴 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비참했던 그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모든 일의 원인을 내게 돌리는 거였다. 나 때문에 생긴 '문제'라면 내게는 시정할 기회가 생긴다. 나를 고쳐 비슷한 일이 다시 닥치지 않도록 하는 게 마음의 상처를 다룰 줄 몰랐던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무리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기 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요청한 대화에서 주동자 중 한 명이 "반응을 좀 더 성의 있게 하면 같이 어울려 주겠다"라는 제안을 했었다. 조건을 받아들이면 나라는 사람 자체가 손상될 것 같아서 거절했었지만, 내 문제점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그 말은 훌륭한 단서가 되었다.
그 뒤로 친구들이 하는 말에 무조건 반응하려고 노력했다. 곧 내 취향을 최대한 억누르는 게 대화를 이어가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때로 '정말?', '우와', '그렇구나!'라고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아득히 멀게 느껴지고 현실에서 붕 떠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태도를 바꾼 뒤 단 한 번도 무리에 배척된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내가 "잘하고 있다"라고 생각했다.
행동은 내 안에 스며들어 의식이 되었다. 친구들이 좋아하는 패션이나 미용, 드라마, 대중가요 등에 맞장구치다 보니 그게 마치 여자라면 당연히 쌓아야 하는 기본 소양처럼 느껴졌다. 나는 좋아했지만 절대 대화 주제가 될 수 없었던 '게임' 같은 취미는 어느새 드러내면 안 되는 것이 되어 내 안의 하위문화로 자리매김했다.
시간이 흐르자, 내가 학생이었을 때와 사회 분위기가 달라졌다.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고 한 분야에 빠져 있는 모습을 '덕후'라고 부르며 인정해 주는 시대가 왔다. 하지만 좋고 싫음을 너무 오래 말살시켜 온 내게는 고유한 취향 같은 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특별히 좋아한다'는 감각을 최우선으로 피해 왔던 사람이 부정해 오던 대상을 한 번에 수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계속해서 '나의 고유성이었을 수도 있던 것들'을 부끄러워했다.
게임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나의 과거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심리 상담을 통해서였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사건을 심층적으로 다루면서 당시의 나를 한심해하고, 굴욕스러워하고, 수치스러워할 게 아니라 열다섯의 어렸던 내가 얼마나 두렵고 외로웠는지 알아주고 보듬어줘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 일이 나의 잘못으로 일어난 '문제'가 아닌 학기 초에 취향이 안 맞는 친구 간에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이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내 안의 가장 수치스러웠던 기억을 재구성하니 왜곡되어 있던 나에 대한 인지가 차츰 제자리를 찾아갔다.
<로스트아크>라는 온라인 게임에 슬슬 재미를 붙이고 있었을 때, 요즘 뭐하냐는 안부 인사에 뭐라고 꾸며낼까 궁리하다가 용기를 그러모아 '게임한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나를 특이하게 바라보고 배척할 거라고 지레 두려워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게임을 하는 내 모습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어떤 봉인이 풀린 것처럼 그 뒤로 게임에 매진 중이라는 사실을 숨김없이 말하고 다녔다. '게임을 좋아한다'는 취향을 드러낼수록 내가 온전해짐을 느꼈다.
서른이 다 되어 게임 하나에 그토록 속절없이 빠져들었던 이유가 계속 궁금했는데, 그 자체가 나의 잃어버린 조각이었기에 그랬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게임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로 인해 내가 더 고유해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