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한 살의 초입에서 나는 게임 <로스트아크>를 그만하기로 결정했다. 순간적인 분노에 휩싸여 내린 결정이었지만 지긋지긋한 혼자만의 싸움을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이 후련하기도 했다.
차게 식은 마음이 미련이란 감정에 줏대 없이 흔들릴까 봐 서둘러 선언하듯 톡을 보냈다. 게임에서 만나 친해진 지인이 깜짝 놀라 지금 통화 가능하냐고 바로 답을 보내왔다. 우리는 새벽 네시가 다 될 때까지 한참을 통화했고 그녀는 끝내 내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출근까지 세 시간. 뱃속이 울렁거려서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는데 꾸역꾸역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고작 게임 하나 그만둔 것으로 일상생활에 타격을 받을 순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구나. 이제 '고작 게임'이구나.
그만두기로 결심한 이상 로스트아크는 내게 '그저 게임'으로만 남아있어야 했다. 내가 내린 결정의 무게가 그제야 실감이 났고, 조금 눈물이 났다.
로스트아크를 그만둔 이유는 쉽게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다. 정말 많이 좋아했고 끝내 혐오했기 때문에 너무나 많은 의미가 '고작 게임' 하나에 엉켜 있었다.
우연히 시작한 게임에 그토록 진심이 된 게 나도 신기해서,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되돌아본 적이 있다.
우선 작은 성취가 모여 게임 캐릭터가 강해지고 그로 인해 더 큰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정직한 구조가 좋았다.
어렸을 때에는 1을 넣으면 1이 나오는 게 당연했는데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해보니 10을 넣어도 1이 채 나오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없던 위염이 생길 정도로 업무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 증세 때문에 심리 상담을 받아야 할 만큼 고생했음에도 그 해 년도 승진이 누락된다거나 하는 상황 말이다. 게임 또한 확률로 운영되는지라 자잘한 실패와 성공이 혼재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현실과 달리 마지막에는 확실한 보상을 주었다. 착실하기만 하면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를 보장하는 게임 속 세상은 게임 자체의 난이도와 상관없이 너무 쉽고, 재밌었다.
재미와 성취감 같은 1차원 적인 이유만으로 로스크아크에 진심이 된 건 아니었다. 로스트아크는 지루했던 내 인생의 탈출구 이자 또 다른 생(生)과 같았다.
로스트아크를 시작하기 직전의 나는 겉으로 보기에 꽤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직장을 다니고 가끔 친구를 만나 회포를 풀고 주기적으로 운동을 하고 꾸준히 책을 읽고 때때로 글을 썼다. 안정은 곧 지루함이기도 해서 나는 새로운 걸 배우거나 새로운 모임에 참석하는 등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곤 했다.
그러다 접하게 된 게임 속 세계는 이전의 시도들이 모두 부질없게 느껴질 만큼 강렬한 자극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나'라는 사람의 기댓값이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은 세상에서 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집단에 소속되고, 현실의 나와 또 다른 정체성으로 사람들과 교류하였다. 말 그대로 겜생(Game生)을 산 것이다. 현실과 완벽하게 유리된 또 다른 인생은 내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해방감을 주었다.
다만 어떤 세상에 '산다'는 건, 그 단어에 함축되어 있는 갈등 또한 품어야 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로스트아크라는 세계에 몰입할수록 나는 게임 안팎으로 여러 가지 갈등을 마주했고 외면하고 싶었던 나의 바닥을 보아야 했다.
일례로, 게임 내에서 맺은 새로운 관계는 다양한 감정을 발생시켰다. 그중 설렘과 기대, 호기심, 유대감과 같은 감정은 기꺼이 수용할 수 있었던 반면 외로움과 열등감, 과시욕, 죄책감 같은 감정은 차마 내 것이라 인정하기 어려웠다. 기쁨에 겨워 아무한테나 '나 요즘 겜생 살아'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그 이면에는 서른 살이나 먹고도 게임을 하고, 고작 게임 따위에 일희일비하는 나 자신을 한심해하는 어떤 악의적인 시선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 존재하는 그 냉혹하고 잔인한 시선은 게임을 하는 내내 나를 갉아먹었고 종국에는 게임을 통해 느끼는 기쁨조차 상쇄시켰다. 그래서 도망치듯 게임을 떠났다.
게임을 그만둔 직후에는 "게임을 그렇게 좋아하더니 왜 그만둔 거야?"라는 질문에 "게임이 재미없어진지는 좀 됐는데 사람 때문에 못 그만두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만해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접었어."라고 대답했었다. 말을 하면서도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어디서 입었는지 모를 마음의 상처가 너무 크고 고통스러워 이 문장 하나로 정리하여 치워 버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좀 흐른 뒤에야 미련, 혹은 고통으로 남아있던 로스트아크에서의 시간들을 찬찬히 음미할 수 있었다. 게임을 할 때에는 몰랐지만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공통적으로 귀결되는 어떠한 믿음과 시선들에 나는 '게임 혐오'라는 이름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