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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솔아 Aug 29. 2023

착한 아이가 크면 이런 어른이 됩니다.


과거를 회상할수록 '타인의 시선'이 나를 관통하는 주제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왜 타인의 평가에 그토록 나를 맞추면서 살았을까? 나는 이 특성이 유년 시절에 기인했으리라 추측한다.


유교적 가풍이 엄했던 친가는 아이라면 응당 보일 수 있는 생떼, 울음, 고집, 투정 등을 문제로 여기고 꾸중과 훈육으로 교정해야 한다고 믿는 집이었다. 어린아이의 '아이스러운' 모습을 잘 인정해 주지 않았기에 아이에게 내려지는 평가는 대체로 엄격하고 냉정했다.


나는 꽤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를 '모나다'고 인지했었다. 친척 어른들이 지나가듯 하는 말을 그대로 흡수한 결과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 유아 시절 떼를 많이 부렸다는 나는 그보다 훨씬 큰 어린이가 된 후에도 당시의 행실을 빌미로 이런저런 말을 많이 들었다. 성질머리가 사납고, 샘이 많고, 버릇없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어른들은 그저 재미로, 할 말이 없어서, 악쓰던 쪼그만 애가 자란 게 신기해서 너도나도 한마디 얹은 거겠지만, 반복적인 평가는 어린 나의 자존을 쉽게 허물었다. 


자존이 무너진 빈자리는 어른들의 평가로 대체되었다. 얌전히 앉아 책을 읽고, 고분고분 대답하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니 '이제야 철이 들고 의젓해졌다'며 칭찬이 떨어졌다. 어떤 행동을 해도 떼쟁이 소리만 듣다가 '잘했다'는 인정을 받는 건 왠지 모르게 감격스러운 일이라 나는 어른들이 말하는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착한 아이'는 다행히 내 적성과도 잘 맞는 편이어서 나는 어른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아이의 모습을 거의 만족시킬 수 있었다.






대체로 나는 훌륭했지만, 어른들의 뜻과 내가 끝까지 합치되지 않는 영역도 있었다. 바로 게임이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부모님과 겪은 갈등의 구 할이 모두 게임 때문이었을 정도로 부모님은 내가 게임 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다른 영역에서는 속 썩이지 않던 자식이 유독 게임과 얽히면 반항아처럼 구는 게 부모님께는 걱정스러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게임'은 하지 말라는 건 정말 안 하면서 큰 내가 부모님과의 갈등을 무릅쓰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이기도 했다. 


부모님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갈등은 내가 고3이 되고 게임을 끊으면서 막을 내렸다. 부모님은 공부를 위해 게임을 그만둔 나를 기특해하시는 것 같았고,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못마땅했던 나는 "수능만 끝나봐. 게임만 주구장창 할 거야"라고 반항하듯 선언했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색하게 수능이 끝난 뒤로도 오랫동안 게임에 손대지 않았는데, 게임이라는 '악의 축'이 사라진 1년 동안 내가 누려온 평화가 사라질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게임을 했을 적에는 부모님과 실랑이를 벌일 때마다 내 본분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죄책감과 자괴감을 느꼈었다. 게임을 끊으며 부모님과 싸울 일이 사라진 고3 시절에는 내게 주어지는 부모님의 신뢰를 그냥 받기만 하면 됐다. 이 차이는 꽤 극명해서 부모님의 애정이 '게임'이라는 조건에 따라 다르게 주어진다고 오해하기 충분했다. 어렵게 얻은 부모님의 지지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던 나는 결국 게임을 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부모로부터 자립하기 위해 꼭 필요했던 절차를 나도 모르게 이탈한 순간이었다. 






나는 대학과 대학원을 휴학 없이 졸업하고 곧바로 취직에 성공했다. 번듯한 직장을 가져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었다는 사실에 인생 최종 과업을 완수한 기분 마저 들었다. 하고 싶은 만큼 게임을 해도 손가락질 받지 않는 나이와 지위를 획득하니 사라진 줄 알았던 게임에 대한 욕구가 다시금 솟구쳤다. 사양 좋은 컴퓨터 한 대를 구입해서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게임들을 하나씩 해나가자, 부모님은 잔소리 대신 기가 차듯 한 번 웃고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왠지 모를 안도감과 해방감이 밀려들어 왔다.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게임에 너무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공부와 게임 사이에 균형을 잘 잡지 못했던 학생 때와 달리 게임을 조절할 수 있는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이 무의식중에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게임이 너무 하고 싶어지면 '스트레스 해소'라는 그럴듯한 역할을 게임에 부여했다. 그건 일하는 시간과 운동하는 시간, 책 읽는 시간, 공부하는 시간, 친구를 만나는 시간을 모두 뺀 자투리 시간 만을 게임에 쓴다는 뜻이었다. 게임 하나에 심하게 중독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플레이한 지 3주가 넘어가는 게임은 슬슬 정을 떼며 전체 플레이 기간을 조절했다. 


내심 자랑스러워했던 내 모든 행동이 전혀 어른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로스트아크에 본격적으로 빠지면서부터였다. 나는 자투리 시간 이상을 게임에 쓰는 내 모습을 위험 신호처럼 느꼈고, 3주가 지나도 게임을 그만두지 못하는 내게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게임을 하면서 알게 된 어른 대부분은 게임을 조절하는데 그토록 집착하지 않았다. 게임을 통해서 얻는 즐거움에 집중할 뿐이었다.


나는 불현듯 부모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통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부모 대리인'과 '착한 아이'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괴상한 어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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