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12일 작성
나와 같이 기상하는 동쪽의 해는 아침밥을 먹는 나와 동반했고, 학교로 걸어갈 때는 하늘로 떠오른 해가 환영했다. 마치 내가 일어나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한 거동이, 나를 지켜보던 고양이가 떠오른다. 나를 보호하는 듯, 그것이 그의 일과라는 그의 졸린 표정은 얼마나 고귀하던가. 그저 귀엽기만 한 존재에서 벗어나, 나를 감싸는 존재가 되는 것이 나에게 주는 안정감은 잊을 수 없다.
미처 한 살이 넘기 전부터 고양이는 그것을 몸에 익혔겠지, 제 나름의 할 일이라고 여겼겠지. 각자 나름의 생애가 있음을 직감하는 것은 무릇 살아있는 것들의 당연지사라고 하겠지만, 나름의 생애에서 누군가를 돌보는 듯한 행동을 하는 것이 당연지사라고 하기에 내 딴에는 그것이 고귀한 것이다. 나를 지켜보는 그 시선이 나를 일으키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내가 아파 일어나지 못하는 때에도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라 한다고 해서 그 눈빛을 방관이라 치부하기에는 나에게 따뜻했다. 동물들 제 나름의 살아가는 방식으로 보호하는 각자의 생존이 있겠지만, 인간이 보호하는 것은 대게 생존보다 후차적인, 보조적인 것 임에 고양이의 행동이 더욱 듬직해 보이다 못해 나와 동등한 삶의 동반자라는 감상이 깊숙했다.
그놈 나를 걱정하듯 오늘 아침 마중 나온 것을 내 깜빡하고 목적지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인 줄 알았다면 눈 한번 마주치고 올 것을, 그러면 그 얼굴 잊는 날 조금 미룰 수 있었을 텐데.
대학교 동창이 고양이를 데려온 것이 기억나네요. 어린것이 저의 손가락만 보면 장난을 치려고 아등바등 뛰어다니던 것이 벌써 생김새만큼은 중년의 신사가 되었습니다.
동창이 귀국할 때면 맡아주던 고양이는 택시 타는 것을 참 싫어했습니다. 되도록 저의 집으로 데려가지 않으려 애썼지만, 바쁠 때는 그저 내 잠자리 피는 것에도 허덕여서 도저히 동창의 집에 들를 여유가 없었어요. 그 친구를 데려가려고 택시로 고양이를 이동시킨다는 것을 연락드리고 고양이를 이동장에 넣으려고 하는 그 순간은 전쟁이요, 나는 갑옷 없는 무고한 시민이라 긁는 대로 긁히는 것이 밤에 별똥별 떨어지듯 내 눈에도 별똥별이 떨어지는 듯한 아픔이었지만, 오랫동안 믿었던 사람에게 강제로 이상한 곳으로 끌려가는 고양이의 마음도 비슷한 아픔이었겠습니다. 동물에게 눈물이 없다고 믿었던 제가 눈물 글썽이는 고양이의 눈을 보고 하는 것이라고는 반성과 미안하다는 말 뿐이었습니다.
주먹을 쥐면 그것을 베개 삼아 자던 고양이는 이제 제 주먹 위에서 잠에 들지 않습니다. 저의 죄가 있으려니, 벌도 있는 것이겠죠. 그렇지만 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저와 같이 잠들고 같이 일어나 주던 그의 일상에, 고마울 따름입니다. 참, 고양이의 이름은 멍멍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