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일기 |Day 26
19.09.30
라바날에 도착했다. 이곳은 한국인 신부님이 있는 작은 마을이다. 연박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연박을 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번 알베르게는 배드 버그 소굴처럼 보이는데. 사다리가 없어 이층 침대에서 내려오려면 다리가 짧은 나와 M은 S의 등을 밟고 내려와야 하는데. 심지어 내일, 철의 십자가를 걷는 중요한 날인데. 이 길 위에서 계획이란 이토록 쓸모없는 것이다.
길 위에서 간간히 마주쳤던 어느 노부부가 있었다. 그분들은 라바날에 먼저 도착해 계셨고, 뒤이어 도착한 우리에게 꼭 성담에 가 신부님을 만나 뵈라고 일러주셨다. 이분들은 이곳에서 연박을 하고 가는 참이라고 했다. 배웅을 하며 대도시도 아닌 작은 마을에 이틀이나 묵은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 나의 일행은 5명이 되었고 우리는 산티아고에서의 계획 무쓸모 이론을 알고 있었다. 그날의 일정은 잠시 미뤄두고 오랜만에 성당에 들렀다.
매우 낡고 아담한 성당이었다. 알아듣지 못할 말들 사이 친숙한 얼굴이 보였다. 한국인 신부님이었다. 미사가 끝난 후, 우리는 말씀이 필요하다며 다가가 말을 걸었다. 사실 그 말씀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우리 모두 종교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저 꼭 만나보라는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고,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나중에 신부님이 말해주었는데 그때 우리는 절박해 보였다고 했다. 순례자들이 자주 찾아오지 않는, 낡은 성당에 특히 어린 5명의 얼굴을 마주한 그때, 모두 제각각의 표정으로 절실함을 말했다고 했다. 나는 절박했던가? 말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엇이 절실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내 얼굴은 분명 절박했던 것 같다.
제일 먼저 왜 이곳에 왔느냐고 물어보셨다. 왜 왔지? 나는 왜 산티아고에 왔을까. 몇 가지 계기는 있지만 이유는 아닌 듯했다. 그대로 말했다. 이유가 생겨서 온 사람도 있지만, 걸으면서 혹은 모든 순례를 마친 후에, 혹은 일상을 살아가다가 이유가 생기기도 한다고 했다. 물이 바다로 향하듯이 그렇게 흘러가기도 한다면서. 다만 완주가 목표인 것이냐 물었다.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데 걷다 보면 그것이 목적이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서.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철의 십자가에 돌을 놓고, 100km 이정표 앞에서 사진을 찍고, 산티아고 성당까지 완주하는 것이 걷는 유일한 이유였던가.
우리는 성당에서 나와 근처 바에서 맥주를 시키고 회의를 했다. 연박의 미스터리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쉬는 것도 순례의 과정이다. 몸은 쉴 새 없이 구르고 있었지만 생각은 어느새 가동을 중단한 상태였다. 그저 발이 목표를 향해 가고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난 왜 이곳에 와 몸을 혹사시키고 있는 것인가. 8킬로짜리 가방을 꾸역꾸역 매고 걷고 있는가. 산티아고 성당에 도착하면 그 이후에는 무엇이 되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잘 모르겠다. 연박 투표를 실시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조금은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맥주잔을 부딪히며 건배를 했다. 짠. 연박이다.
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라바날에는 라면을 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