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일기 |Day 12
19.09.16
이곳은 인사와 응원이 접합된 말이 숨 쉬듯 오간다. 부엔 까미노. 직역하자면 좋은 길 되세요. 그냥 "안녕하세요."나 다름없는 말이지만, 진심이 담기면 정말로 느껴진다. 그 응원에 힘이 난다. 그래서 나는 늘 말한다. "부엔 까미노.". 눈으로도 말을 한다. "조금만 더 버텨요. 우리.."
오늘은 오르막이 제법 심한 구간이 있었다. 그 와중에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스틱도 없이 맨 몸으로 힘겹게 올라가고 있어 눈을 맞추고 인사를 건넸다. 순간 그녀가 힘을 내는 게 느껴졌다. 역시 진심은 통해. 왠지 모르게 몽글해진 마음을 앉고 올라가고 있는데 언제 따라왔는지 어느새 그녀가 다가와 초콜릿을 건넸다. 가방에 초콜릿이 있었지만 감사히 먹었다. "잇츠 쏘 하드" "예스 잇 이즈" 너털웃음을 짓곤 다시 출발. 등 뒤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엔 까미노!
그 뒤로 몇 번을 더 만났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초콜릿을 건넸다. 이제 괜찮은데.. 그보다 왜 이렇게 잘 걸으시는 거야. 계속 앞질러도 잠시 쉬는 틈에 언제고 다시 만나 약간 머쓱해졌다. 응원은 내가 받아야 할 판이었다. 아니, 초콜릿을 주신 이유가 혹시..? 누가 봐도 체력 쓰레기처럼 보였나. 난 누구를 걱정한 걸까. 그녀는 스틱 없이도 잘 오르는 등산의 고수였다.
이밖에도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쥬비리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초코바를 쥐어주었던* C와 삼일 만에 다시 만나 그 길로 같이 걷고 있다. 그동안 커플로 생각해 그들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던(?) D와 F는 알고 보니 남매였고 아주 재미있는 친구들임을 알게 되었다. 다음 마을의 알베르게에는 베드 버그가 많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어 내일은 이들과 함께 하루치의 코스를 건너뛰고 큰 마을에서 에어비엔비를 예약해 쉬기로 했다. 순례길을 오롯이 다 걷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친구 A는 건너뛰지 않겠다고 했다. 걱정되는 마음에 가방에 있는 베드 버그 약을 꺼내 주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나보다 어른인 A가 잘 걸어올 것이라 믿는다.
관계가 겹겹이 쌓이고 있다. 그러려고 온 게 아닌데 그러고 있다. 사람이 모인 곳에 관계가 없을 리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다. 나는 혼자가 좋다."라는 말은 아무것도 모르는 때나 할 수 있다. 무거운 어깨와 욱신거리는 발로도 끝내 하루치의 거리를 걸을 수 있는 이유는 누군가 건네는 인사와 응원과 초콜릿과 베드 버그 약 덕분이다. 관계가 농익을수록 인생의 맛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층이 겹겹이 늘어날수록 깊어지는 페스츄리의 맛이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나는 이따금 혼자서도 대단한 척을 한다.
* 따로 또 같이 편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