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일기 | Day 9-10
19.09.15
걷는 행위는 정직하다.
한 부위를 다치면 필연적으로 그 부위 대신 다른 곳이 일해야 하기 때문에 쉬지 않으면 아픔이 소멸되는 일은 없다.
나는 지금 쉴 수 없으니 오른쪽 무릎에서 오른쪽 발목으로, 왼쪽 무릎에서 다시 왼쪽 발목으로 돌아가면서 고통을 느끼는 중이다. 몸에게 미안하다.
시간 또한 못지않게 정직하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시간만은 착실히 흘러 벌써 열흘이 지났다. 떠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달달 떨었는데 지금은 그때의 내가 가소롭다. 이깟게 뭐라고 떨었는지. 그때의 나를 만나게 된다면 오래된 명언을 인용하겠다.
"야. 쫄지마.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야."
적응의 동물인 나는 갈수록 모닝 루틴을 고효율화 시키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요즘의 모닝 루틴
1. 동트기 전 울리는 알람 소리에 일어나 삭신이 쑤시는 몸을 스트레칭을 한다.
2. 어두운 침대 위에서 대충 겉옷을 갈아입고 베드버그가 들어가지 않게 곧바로 침낭을 둘둘 말아 정리한다.
3. 슬리퍼를 신고 일어서서 혹시 심장이 발바닥에 있는 건가? 하고 잠시 생각한다. 8시간의 걸음을 고스란히 머금은 발바닥이 아우성친다.
4.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세면도구를 챙겨 더듬더듬 화장실로 향한다. 그러다 세면도구 몇 개를 빼먹은 게 생각나 다시 돌아가기를 몇 번 하며 잠에서 깬다.
5. 양치와 세안을 마치고 무게를 아끼기 위해 딱 하나만 가져온 올인원 로션을 바른다. 그 위에 선크림을 덕지덕지, 말 그대로 덕지덕지 바른다.
6. 어제 사두었던 아침 과일(주로 사과 혹은 납작 복숭아)을 간단히 챙겨 먹을 즈음 친구들이 일어난다.
7. 큰 일을 치르고, 가방을 정리한다.
8. 바세린을 바른 발가락에 발가락 양말을 신고 그 위에 등산 양말을 덧신는다. 덕분에 아직까지 물집이 생기지 않았다.
9. 마지막으로 등산화를 신고 무릎 보호대를 찬 후 가방을 메고 등산 스틱까지 펴면 하루 중 가장 바지런한 시간이 끝난다.
점점 익숙해지고 단단해지는 준비과정이다.
오늘은 익숙함에 대해 생각했다. 익숙하다는 것은 편하다는 것. 편하다는 것은 지루하다는 것. 지루하다는 것은 특별한 일을 갈망하게 된다는 것. 맞다. 지금 나는 익숙함을 넘어 이 길이, 패턴이 조금씩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자극을 찾아 산티아고에 왔는데 이젠 산티아고에서의 특별한 일을 찾는다. 이게 왠 뫼비우스의 띠인가.
문득 여태껏 내가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마냥 굴었던 건 장소나 상황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익숙함에 안정감을 느끼기보다 또 다른 자극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니면 너무 다양한 자극에 노출되어 걷고 생각하고 씻고 먹는 생활이 오히려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때에 따라 마구 흔들리는 사람은 매력이 없다. 그러니 편안하게 생각해보자. 내가 이 길을 걷고 있는 이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