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상대를 배려한다는 것
운명이 궁금해서 점쟁이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때는 고3 때였는데 어떡하든지 대가족 우리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거의 열대여섯이나 되는 가족들 속에서 하루도 평온한 일이 없을 정도로 문제가 터졌다.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 할머니, 부모님, 우리 형제들이 7명이었다. 시집가서 적응 못한 고모도 딸과 함께 와 있었지. 농사도 많았던 우리 집은 머슴 일군도 두어 명 있었다. 식구가 많고 농사일도 많다 보니 늘 사람들이 득실득실했다. 시골이라 농사일이 많고 사람들도 많이 드나드니 늘 잡다한 사건들이 생겼고 옳고 그름을 시비하는 일들이 많았다. 난 그게 싫어서 밖으로 나돌았다. 도서관에서 저녁에 집에 오든가 학교에서 방과 후 활동을 하면서 늦게 집에 갔다. 몸이 약한 편이어서 걸핏하면 코피를 줄줄 흘리던 고3 생활도 지긋지긋했다. 저녁 8시까지 했던 보충 수업도 힘들었다.
어쨌든 나는 여기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탈출을 해야 했다. 그것이 가능한 지 물어보려고 맹인 점쟁이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를 딱 만나자 생뚱맞게도 이상한 질문을 먼저 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눈을 끔벅이며 내게 물었다.
"뭐가 그리 궁금한가?"
"제가 사귀는 남자 친구랑 잘 될까요?"
"아하, 남자 친구랑 잘 될까 그게 궁금한가?"
"띠가 무슨 띠요?"
"예! 남자 친구는 용띠이고 저는.. "
"아이고 잘 만났네, 아주 좋은 궁합이요"
사실 우리 반 전체가 담임이니 국어 선생님을 사모하고 있었다. 아니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사랑을 많이 주셨다. 그중에서도 나는 집이 가장 멀어 선생님이 보충 수업이 끝난 밤이면 늘 집 가지 바래다주셨다. 난 그걸 선생님이 나만 은밀하게 더 좋아하신 증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은근히 행복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랑 뭘 어쩌겠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사춘기 소녀들이 흔히 갖는 그런 상사병 같은 것이었다. 그런 그분이 갑자기 점집에서 남자 친구가 되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미안하다.
"그럼 이번에 대구로 대학을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잘 될까요?"
"응, 객지로 나가겠구먼!"
"정말요?"
그해 나는 정말 대구로 진학을 했고 드디어 가족을 떠나 객지로 나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정작 유학을 왔지만 그렇게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재미없는 전공은 정말 시시했고 젊은 교수들은 내게는 너무 시원찮았다.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가 인생을 논하는 철학적인 모습을 기대했던 지라 대실망이었다. 나는 방황했고 학교를 쉬었다.
살아가면서 의식주를 유지하고 학력도 높이면서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삶의 무료함을 해소하기 위해 교회에 열심히 다녔고 선교 모임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저 좋은 소식은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만났다는 것이다. 남 보기에는 참 좋은 기회였고 나는 그 길로 좋은 곳에 발령까지 받았다. 인생에 대한 남다른 기대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생활도 재미가 없었다. 그저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뿐이었다. 왜 나는 사는 재미가 없었을까? 모 탤런트를 닮았다는 외모와 늘씬한 몸매까지 나는 겉으로는 완벽한 아가씨였다. 그럼에도 결혼도 싫었고 이대로 살기도 괴로웠다. 그저 돈에 쪼들리는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지 월급은 부모님 게 다 드리는 형편이었다. 시골에서는 부자 소리를 듣는 집안이었지만 실제로는 아이들 교육비만도 장난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농사일과 학교 교사일을 둘 다 병행했다. 다행히 농사가 있었기에 먹고사는 건 보충이 되었다. 용돈은 거의 없었고 겨우 차비만 타서 학교를 다녔다
산다는 것은 늘 이런 것일까?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가?
늘 돈에 쪼들리며 살아야만 하는가?
불만 속에서 시간은 흘러갔고 교회 사람들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났다. 겉으로는 음식점도 하고 집도 자가인 댁이었지만 어둠의 그늘이 짙은 집이었다. 남자의 아버지는 위암이었고 손위 누나는 첫사랑에 실패한 아픔으로 정신을 놓고 살아 몸이 뚱뚱해진 채로 정신과 약을 먹고 있었다.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적응이 안 되었다. 치명적인 건 이 집도 돈이 없었다. 식당도 잘 되지 않았고 병을 앓던 어른도 돌아가셨다. 나는 잠시 기대를 하다가 접었다. 그때 나는 몸이 말이 아니었다. 병원에서는 암과 같은 병이라 했다. 몸은 여위고 죽을 것 같았다. 부모님의 권유로 대구 병원에 입원했고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항암 치료가 다 끝나자 이제 휴양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삶에 대한 내 불만은 여전해서 그 불만이 불안이 되었고 내게는 한 순간도 마음이 쉬지 못하는 두려움으로 발전했다. 세상은 나를 버렸고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나는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일단 집을 나왔다. 경기도로 훌쩍 떠났다. 우연히 알게 된 교회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숙식을 제공받으며 교회 일에 전념했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디고 하루하루 견뎌보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점점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리고 몸도 점점 좋아졌다. 아마도 조건 없이 봉사하던 마음이 나를 살렸던 것이 아니가 한다. 몸이 좋아지니 병으로 그만두었던 직장도 다시 회복되었다. 그렇게 나는 내 운명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절대로 돈 때문에 우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다짐을 했고 아등바등 돈을 모아 작은 아파트를 샀다. 그리고 차분하게 나의 행복을 찾아 여러 공부를 했다. 대학원에 가서 심리학을 공부했고 인도에 가서 명상을 배웠다. 나의 배움이 철저하지 못했는지 나는 잠시 동안 행복감에 빠졌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 후 오랫동안 이런저런 종교에 빠져 살았다. 가는 곳마다 집중했기에 가르침의 핵심을 빨리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을 보고 실망했다. 그들은 행복해지는 법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개 아니라 조직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더 힘을 기울였다. 사람들을 더 많이 끌어모으는데 전심전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