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도 없이
오늘의 땀방울이 내일의 희망이 될 때
홍의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 <소리도 없이>는 범죄 조직의 하청을 받아 시체의 뒤처리를 전문적으로 맡는 창복(유재명)과 태인(유아인)을 담는다. 그들은 사람을 잠시 맡으라는 지시에 유괴된 아이 초희(문승아)를 데려온다. 그 지시를 내린 실장(임강성) 역시 목숨을 잃게 되자, 아이는 '인수인계' 되지 않은 채 덩그러니 창복과 태인에게 떠넘겨진다. 하청업체로 범죄의 뒤처리만 맡았던 그들은 졸지에 유괴의 주체가 된다.
오늘의 땀방울은 내일의 희망이 된다
<소리도 없이>는 범죄 조직의 말단으로 그것에 가담하고 있는 창복과 태인을 성실한 직업인으로 묘사한다. 그들은 인계받은 대상을 조직원들이 죽이기 좋게 매달아두고,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치우는 등 살인의 자질구레한 일을 담당한다. 시체유기 그 자체도 범죄이겠으나, 그들에게 그것은 생업을 위한 하나의 직업일 뿐, 특별한 죄의식이나 감정을 내보이지는 않는다.
창복은 굴종적인 태도가 내면 그 자체에 스며든 인물이다. 영화의 초반 실장이 작업장을 찾을 때 창복이 그들에게 보이는 태도는 예의가 바르다기보다는 굽신거린다는 표현이 더 걸맞다. 그들이 살인을 저지르는 동안 창복과 태인은 잠시 자리를 피하는데, 태인은 실장의 차에 올라타 그가 피던 담배꽁초 한 개비를 몰래 피운다. 창복은 태인에게 자신의 분수에 넘치는 것에 욕심을 부리다가는 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창복은 절름발이인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 감사해하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든지 굴종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그런 인물이다.
창복과 태인의 작업장의 한 벽면에는 '오늘의 땀방울이 내일의 희망이 된다'라는 글귀가 적힌, 하와이처럼 보이는 그림이 걸려 있다. 그 그림이 걸려있는 작업실에서 창복과 태인은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 도달하고자 하는 꿈의 공간이라는 테마는 많은 영화 속에서 등장했다. 예를 들어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무니(브루클린 프린스)가 마지막으로 도주한 디즈니랜드가 그런 곳이다. 또는 최근에 개봉한 한국의 범죄 영화에서 꿈의 공간이자 도주의 공간은 그들의 마지막 범죄에 대한 동인이 되었다. 이를테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인남(황정민)은 마지막 임무를 마친 후 파나마로 밀항하려 했고, <사냥의 시간>에서 아이들은 강도를 통해 큰돈을 벌어 해외로 이주하려 했다.
꿈의 공간은 그들에게 허용된 마지노선이다. 또는 삶의 끝자락에서 그들이 마지막 선택을 강제하게 하는 약속이다. 그들이 마지막 약속에 성공한다면, 최후의 임무를 완수한다면 그들은 그 꿈의 공간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에 그치는 시뮬라크르, 그 앞에 놓인 약속은 무용한 것이다. 무니가 도주한 디즈니랜드는 그 자체가 자본주의의 극단인 미국을 상징하는 시뮬라크르이다. 인남이 파나마로 밀항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림 같은 사진 앞에서였다. 그들의 약속은 애초에 무용한 것이었고,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소리도 없이>에서도 많은 영화처럼, 이미지에 그치는 시뮬라크르 앞에서 '오늘의 땀방울이 내일의 희망이 된다는' 약속은 무용해 보인다.
<소리도 없이>가 인상적인 영화가 되는 것은 클리셰가 된 그 무용한 약속을 뒤집는 순간부터이다. 창복은 얼떨결에 초희를 맡게 된 태인에게 아이를 집에 두고 출근하라고 한다. 동생인 문주 때문에 문을 잠글 수 없는 태인은 초희를 작업장에 데리고 온다. 그곳에서 초희는 창복과 태인이 시체를 처리하는 작업을 목도한다. 작업의 마지막, 시체를 땅에 묻을 때 초희는 창복의 손을 꼭 잡고 있다. 그때 창복의 팔뚝에서 땀방울이 흐르는데, 그 땀방울은 팔을 타고 흘러내려가 초희의 손에 닿는다.
창복에게 굴종적인 태도가 그의 생존전략이었다면, 초희는 '말을 잘 들으며 동생을 잘 돌보는 착한 아이'가 되는 것을 자신의 생존전략으로 취한다. 초희는 방 안에 그저 누워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태인이 방에 들어오자, 초희는 벌떡 일어나 문주가 그림 그리는 것을 돕는다. 초희는 문주에게 옷을 개는 방법을 알려주고, 문주와 함께 저녁 식사를 차리고 아마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손빨래를 한다. 창복의 땀방울은 내일의 희망이 되어, 초희에게 닿는다. 초희는 살아남기 위하여 다시 땀을 흘린다. 카메라가 창복과 초희의 맞잡은 손을 담았을 때, 작업장 한편에 걸려있던 그 문장은 더 이상 비유적인 문장이 아니며 서늘한 진실이 된다.
<소리도 없이>가 내포하는 서늘함은 무용한 약속마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지금까지 스릴러 영화나 범죄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동인이 되었던 일말의 희망, 시뮬라크르 앞에서 맺었던 무용한 약속마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수많은 사람을 잔혹하게 죽였던 인물들도 느꼈던 죄책감이라는 일반적인 감정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그 일을 해내야만 한다. 절름발이인 창복에게, 농인인 태인에게 그것을 제외한 생존 방식은 없다. 그들이 현재 흘리는 땀방울이 희망이며, 그 희망은 생존으로서만 치환된다.
떨어지는 것과 올려다보는 것
태인은 창복과 달리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것은 물론 영화의 제목처럼 그가 말을 하지 않다는 것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다만 생각과 욕망이 오로지 언어로서만 치환되는 것은 아니기에, 소리가 아닌 태인의 모든 것에 우리는 집중해야 한다. 오히려 창복이 현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직업정신을 묵묵히 발휘할 뿐이라면, 태인은 보다 복합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는 이로 보인다.(창복은 내내 거절하던 일을 결국 본인이 하게 되었을 때, 죽음을 맞는다.) 태인은 위를 올려다보는 인물이다. 실장이 처음 작업장을 방문했을 때, 내내 굽신거리는 창복과는 달리 태인은 어딘가 불만에 가득 찬 눈을 보인다. 그는 실장의 차에 몰래 타 담배를 훔쳐 피우곤 한다. 실장이 결국 죽음을 맞았을 때, 그의 양복을 훔치기도 한다.
앞서 창복의 땀방울이 초희의 손에 떨어지는 장면을 살펴보았는데, 영화는 그러한 하강에 주목한다. 태인이 실장의 양복을 훔치고 나서 피로 물든 옷을 빨고 널었을 때,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담는다. 영화의 모든 것은 상부에서 하부로 떨어진다. 영화의 모든 곳에 적용되는 그 중력의 법칙은 비정하고 잔인하다. 절름발이인 창복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그 일을 묵묵히 해낼 수밖에 없었으며, 유괴되어 있는 초희는 살아남기 위해 말을 잘 듣는 아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고 겨우 현재를 유지하거나, 또는 전락한다. 태인의 동생인 문주는 조금씩 그 규칙에 순응한다. 아버지로부터 몸값을 전해받지 못했기 때문에 초희는 아동 매매범에게 다시 팔려간다.
문제는 태인이 그 중력의 법칙에 순응하다가도, 위를 올려다보는 선택을 취할 때 발생한다. 부모에게 돈을 받으러 간 창복이 사고로 돌아오지 않자, 약속대로 태인은 아동 매매범에 초희를 데려간다. 초희를 데려간 태인은 다시 집에 돌아온다. 집에 돌아와 태인은 문득 왼쪽 위 벽에 걸린 양복을 올려다본다. 태인은 다시 초희를 구하러 자전거를 타고 집을 떠난다. 그 장면 이후는 초희를 구하기 위해 태인이 봉고차에서 벌이는 액션 시퀀스이다. 그것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소리도 없는’ 액션 시퀀스인데,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 액션이 왜 발생했느냐에 대한 것이다. 태인은 위에 걸려 있는 양복을 올려다보았기에 초희를 구하러 나왔다. 창복은 자신의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했지만 태인은 실장의 자리를 바라보았기에 양복을 훔쳤다.
태인은 자신의 옷을 양복으로 갈아입은 후 초희를 구하러 간다. 그것은 아마 늘 낮은 자리에 있었던 태인이 처음으로 자신보다 낮은 곳에 존재한 무엇이 있음을 깨달았다는 표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초희는 언제나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던 태인에게 최초로 등장한 내려다보아야 하는 존재이다.
<소리도 없이>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적용하는 중력의 법칙이 연쇄적으로 작용하는 공간이다. 이를테면 오리 백숙 가게로 위장한, 팔려갈 아이들이 모여 있는 집에 진입할 때 초희는 넘어져 손이 더러워진다. 그 장면은 이후에 정확하게 반복되는데, 초희를 납치한 유괴범들이 그 집을 찾을 때이다. 조수로 보이는 남자는 초희와 똑같이 넘어져 손이 더러워진다. 영화의 초반에 보여주었듯이 넘어진 그 남자는 여자의 가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아이와 같은 사람이다. 초희와 남자가 동시에 넘어지게 하였을 때, 영화는 초희가 곧 그 남자와 같은 범죄자가 될 것이며, 성장하지 못한 그 남자는 예전에는 초희와 같은 무구한 어린아이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태인은 어느덧 자신이 내려다볼 존재가 생겼다는 사실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한다. 이제 그 중력의 법칙은 태인에서 초희에게 작용할 것이다. 집에서 도망쳐 온 아이를 찾던 경찰(김한나)이 마침내 태인의 집에 다다랐을 때, 격투 끝에 경찰을 기절시킨 태인은 그녀가 사망한 것으로 오인한다. 어쩔 줄 모르는 태인에게 초희는 삽을 건넨다. 집의 축사에 경찰을 묻던 태인은 초희가 문주에게 삽질을 가르치는 것을 목격한다. 이제 그 비정한 중력은 초희에서 문주에게 흐른다.
그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태인은 초희를 놓아주어야만 했다. 그는 초희를 그녀가 다니는 학교에 데려다준다. 이후 사람을 피해 도주하던 태인은 자신의 양복을 벗어던진다. 영화가 그 결말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나로서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비정한 사실은 태인은 더 이상 도주하지 못하고 경찰에게 붙잡혔을 것이고, 태인의 집에는 문주가 홀로 남겨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비정한 연쇄의 고리는 이미 문주에게도 적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이 영화의 가장 서늘한 지점을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