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의 여름밤

영화가 옥주에게 되찾아주려 했던 어떤 것

by 박현신

벌새와 남매의 여름밤

그동안 한국 영화에서 배제되었던 이의 목소리를 되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그것을 연출한 감독이 모두 젊은 여성 감독이며 에드워드 양을 좋아한다는 사실에서, <남매의 여름밤>은 분명 <벌새>와 함께 논의될 수밖에 없는 영화일 것이다. 그러나 <남매의 여름밤>과 <벌새>는 그 외피에서 수많은 점들을 공유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두 영화의 처음은 다음과 같다. 먼저 <벌새>는 불안에 떨며 아파트 현관문을 두드리는 한 소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곧 소녀는 그곳이 본인의 집이 아닌, 아랫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남매의 여름밤>은 그 정반대에서 출발한다. 한 소녀가 집 안을 서성거린다. 곧 현관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재촉하자 소녀는 다마스에 몸을 실은 채 낯선 공간으로 이동한다.


오프닝 시퀀스는 <벌새>와 <남매의 여름밤>의 차이를 요약한다. <벌새>에서 은희는 모든 것이 분명 이전과 똑같은데, 1994년의 여름 그것에서 이질감을 느낀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조금씩 자각하는 은희에게 세상은 기묘하게 뒤틀려있는 곳이다. 서로를 죽일 것처럼 싸우던 부모님이 어느 순간 화목하게 TV를 보고 있는 광경을, 좋아하던 마음을 한순간에 접어버리는 후배의 모습을 은희는 이해할 수 없다. 은희가 경험하는 1994년의 여름은 그렇게 뒤틀려있는 곳이며,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사고까지 목도한다. 단절이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세계 속에서 은희는 그 작은 몸으로 그 중력의 무게를 겨우, 또는 힘차게 견뎌낼 뿐이다.


<남매의 여름밤>은 익숙한 공간에서 낯선 공간으로의 이동에서 시작하는 영화이다. 할아버지의 집에서 방학을 보내게 된 옥주(최정운)는 은희처럼 본인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조금씩 자각해간다. 다만 은희는 익숙한 공간에서 어떤 기묘한 이질감을 느낀다면, 옥주는 낯선 공간에서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살아내는 것 같다. <벌새>가 은희에게 더 이상 과거와 같아질 수 없는 결정적인 단절을 겪게 함으로써 새로운 희망을 찾게 하였다면, <벌새>는 옥주에게 존재했던 무엇인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것을 영화로나마 회복하게 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는 <남매의 여름밤>이 옥주에게 되찾아주고 싶었던 무엇에 대해 다루려 한다.



모든 것은 반복된다

다시 오프닝 시퀀스로 돌아가서, 카메라는 옥주 가족이 이동하는 다마스를 정면에서 담는다. 영화는 카메라와 차량과의 거리를 늘렸다가 일순간에 좁히기를 반복하며 롱테이크로 담아낸다. 단순히 테크닉적인 과시를 하고 있어서 그 카메라의 움직임에 주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영화가 일반적인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 같다. 해당 쇼트에서 카메라는 차폐되어 있는 차량과 분명하게 떨어진 거리에 있는데, 영화는 차 안 인물들의 대화와 라디오 소리를 담는다. 영화의 중반쯤 그 장면은 정확하게 반복되는데, 남자친구에게 선물한 운동화를 도로 뺏은 옥주가 자전거를 타고 도망칠 때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옥주의 자전거를 카메라는 정면에서 롱테이크로 담는다.


병기(양흥주)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처분하고 할아버지(김상동)의 집으로 도피한다. 아마 병기는 사업에 실패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집의 재산을 상당 부분 날렸을 것이다. 그 도피는 옥주에게 반복된다. 옥주는 아버지가 팔고 있는 신발을 훔쳐 남자친구에게 선물하는데, 그 신발이 가짜임을 알게 된다. 다시 남자친구를 만난 옥주는 신발을 다시 빼앗고, 자전거를 타고 도피한다. 영화는 그것을 명백하게 연결함으로써, 병기의 이야기가 다시금 옥주에게서 반복하게끔 한다.


다시 영화의 첫 장면에서, 다마스를 타고 할아버지의 집으로 이동하는 순간에 옥주가 병기에게 했던 말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할아버지에게 말은 했어?”라는 무심하면서도 날카로운 옥주의 한 마디. 옥주는 분명 아버지에 원망과 혐오의 감정을 갖고 있다. 병기는 몇 번이나 사업에 실패하여 가정에 어려움을 초래하고 할아버지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 옥주의 눈에는 그러한 아버지가 초라하고 한심해 보일 뿐이다. 그러한 혐오감은 할아버지가 건강에 문제를 보이자, 고모(미정, 박헌영)와 함께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신 후 집을 팔 계획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증폭된다.


병기에 대한 옥주의 감정은 공간의 분리를 낳는다. 할아버지의 집에 도착한 옥주는 2층의 한 방을 자신의 방으로 삼는다. 옥주는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2층 방에 모기장까지 설치한다. 이사 온 첫날 동주(박승준)는 옥주에게 함께 모기장 안에서 자고 싶다고 투덜대지만, 옥주는 끝내 동주를 밀어낸다. 양옥집 중 2층, 2층에 있는 하나의 방, 그 안에 있는 모기장 속은 옥주의 공간이며, 옥주의 허락이 전제되어야 진입할 수 있는 공간이다. 동주와 미정이 그곳으로 진입한 것에 비해, 병기는 끝내 진입하지 못한다. 집을 보러 온 손님이 찾아왔을 때, 겨우 노크를 하고 옥주의 방문을 열 뿐이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단연 도쿄의 시간과 타이베이의 시간을 교차 편집하는 순간일 것이다. 영화는 도쿄에서의 NJ의 데이트를 타이베이에서 팅팅의 데이트와 교차한다. 두 개의 시공에서 벌어지는 데이트는 모두 넓은 의미에서 불륜에 해당할 것이며, 그것은 아버지 세대에서 자녀 세대로 대물림된다. 그것은 팅팅이 그러한 부모 세대에 대한 혐오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과는 별개이다.


<남매의 여름밤>에서도 병기의 이야기는 옥주에게 반복된다. 병기가 할아버지 몰래 할아버지의 집을 팔려했던 것처럼 옥주는 병기 몰래 신발을 훔쳐 남자친구에게 선물하였고, 중고 거래를 하였다. 할아버지를 모실 요양원을 알아보고 온 병기는 미정에게 나중에 자식들이 본인을 요양원에 모실 것을 생각하면 느낌이 이상하다고 고백한다. 아마 그 이야기 역시 반복될 것이다. 옥주는 그것이 자신에게도 반복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옥주는 할아버지 몰래 집을 팔려하는 것에 화가 나 병기를 쏘아붙인다. 별다른 반박의 말을 찾지 못하던 병기는 옥주에게 신발을 훔쳐 판 것도 똑같다고 말한다. 옥주는 그게 어떻게 같냐며 당황하지만, 두 행위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던 옥주는 갑자기 감정이 올라와 서럽게 운다. 그것에는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겠지만, 그중에 자기혐오의 감정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프게 느껴진다.



기억이 꿈이 될 때, 꿈이 기억이 될 때

병기와 미정은 본인이 꾸는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병기는 어렸을 적 아버지가 자고 있는 본인을 한밤중에 학교에 가야 한다고 깨웠던 기억에 대해 꿈을 가끔 꾼다고 고백한다. 미정은 어머니에게 포대기를 쌓인 채 편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이 꿈에 나오는데, 돌이켜보면 그것은 본인의 기억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라는 사실이 재밌다고 한다. 기억은 꿈이 되고, 꿈은 기억이 된다. 옥주 역시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엄마와 화해하는 꿈을 꾼다. 잠에서 깨었을 때, 옥주는 엄마가 장례식에 다녀왔으며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딸을 깨우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을 동주를 통해 듣는다. 영화는 다만 어린 소녀의 상처를 꿈이라는 매개를 통해, 영화라는 이미지를 통해 조금이나마 되찾아주려 할 뿐이다.


첨언하고 싶은 것은 할아버지의 이미지가 현실이라는 배경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의 공간에서 부유하는 꿈과 기억을 닮았다는 점이다.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는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데 그 자체가 다른 리듬을 가진 존재처럼 보인다. 특히 그 독특한 리듬감이 현실을 살아내기 바쁜 병기와 미정과 대조될 때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는 그 느린 리듬이 아이들의 리듬과 조화되었을 때 주는 감동을 포착한다. 이를테면 동주와 할아버지가 서로 손을 흔드는 장면이 그렇다. 삶을 시작하는 동주와 삶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할아버지가 서로에게 손을 흔들 때, 영화는 각자를 정면에서 교차하여 담아내는데 그 대조가 꽤나 인상적이다. 계단을 내려가던 옥주가 1층에서 할아버지가 신중현의 미련을 듣는 모습을 보았을 때, 옥주는 할아버지의 리듬을 방해하지 않은 채 계단에 걸쳐 앉아 함께 음악을 들으며 그 리듬을 공유한다.


옥주와 동주가 다툴 때, 어느새 2층으로 올라와 옥주를 한 번 다독이며 동주를 데려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큰 울림을 주는 것은 그 장면이 할아버지라는 모습으로 물화된 보편적 꿈과 기억의 정서를 소환하는 장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옥주의 꿈은 기억이 되고, 기억은 다시 꿈이 될 것이다.


여름밤 남매의 기억은 꿈이 될 것이고, 그 꿈은 다시 기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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