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과거와 현재가 엉겨 붙어 있는,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공간

by 박현신

노크 소리가 들린다. 곧이어 사람이 없는 헌책방을 비추는데 소담(박소담)은 제문(윤제문)에게 후쿠오카로 여행을 떠날 것을 제안한다. 소담은 반응이 없이 졸고 있는 제문의 코에 손을 갖다 댄 후, 깨어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카메라는 책장의 반대편, 가득 꽂혀 있는 책 중 조그마한 틈으로 소담과 제문을 담는다. 이후 제문은 소담과 투닥거리는데, 제문은 알 수 없는 남성의 소리를 듣는다. 카메라는 미로와 같이 복잡한 헌책방을 배회한다. 소담과 제문이 후쿠오카로 여행을 떠났을 때, 제문이 소담을 한 술집에 데려다주었을 때, 관객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는다. 제문은 소담에게 대학 선배이자 현재 후쿠오카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해효(권해효)와 28년 전 순이라는 여인을 동시에 사랑하였고, 순이에게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자, 그녀가 홀연히 떠났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경주>의 윤희(신민아), <춘몽>의 예리(한예리)처럼, 소담 역시 현실의 물리법칙으로부터 초월한 것 같은 묘한 캐릭터이다. 그녀는 때로 물리법칙에서 벗어나 유령처럼 다른 공간으로 사라지기도 하며, 외국어를 전혀 하지 못함에도 일본인, 중국인과 각자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소담은 28년 전 순이가 제문과 해효 앞에 다시금 육화한 존재처럼도 보이는데, 제문과 해효는 소담을 매개로 해묵은 감정들을 조금씩 풀어놓는다. 먼저 장률 감독의 많은 영화가 그랬듯이, <후쿠오카> 역시 영화가 여성 캐릭터를 대상화하고,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에 기반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를 통해 감독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소통하고자 하는 소담 같은 캐릭터가 해묵은 감정을 해소하는 것에 필요하다고 밝혔으나, 소담의 소통이 중년의 남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20대 여성에 대한 일종의 편견으로 작용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영화는 소담을 기묘한 분위기로 그려내는 것만큼, 후쿠오카라는 공간 자체를 기이한 곳으로 그린다. 첫째로, 후쿠오카는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엉겨 붙어 있는 곳이다. 제문은 28년 전 순이가 좋아했던 헌책방의 주인이 되었고, 해효는 순이의 고향인 후쿠오카를 찾았다. 제문과 해효는 각각 28년 전의 시간에 멈추어 있는 존재인데, 제문이 해효를 찾아간 순간 28년 전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엉겨붙는다. 어쩐지 소담은 28년 전의 순이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순이를 통해 제문과 해효의 시간은 다시금 흐르게 된다. 둘째로 영화는 후쿠오카를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려지는 공간으로 그린다. 소담은 후쿠오카를 방문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어떠한 이유인지 유키(야마모토 유키)는 1년 전 헌책방에서 소담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소담과 만나는 중국인은 2년 전 꿈속에서 자신이 후쿠오카의 한 공원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것이 지금 현실이 되었다고 말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술집에서 소담, 제문, 해효가 벌이는 연극일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상처를 직접 대면하지 않고, 그것을 대상화하여 멀리서 관조함으로써 28년의 시간이 축적한 감정을 만지려 한다. 소담은 제문과 해효에게 자신은 진심으로 두 명을 동시에 사랑하기 때문에, 동시에 연애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제문과 해효는 연기를 빌려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다. 영화의 카메라는 종종 하나의 인격체처럼 부유하며 인물을 관조하는 데, '대상화하기'는 연극에서 벌어지는 것임과 동시에 영화가 인물을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정전상태였던 가게의 불이 갑자기 환하게 켜지면서 연극도 갑자기 막을 내린다. 언제까지나 감정의 응어리를 관조할 수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 그들은 28년의 시간을,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직접 응시한다. 언제나 그들을 따라오고 있는 절대적인 것(철탑) 앞에서 소담과 유키는 입을 맞춘다. 철탑에 올라 제문과 해효는 술집을 내려다본다. 갑자기 소담은 헌책방에 전화를 걸고, 현재의 시점에서건 전화는 28년 전의 헌책방으로, 28년 전의 제문과 해효에게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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